현실 육아가 덕후를 삼킬 때
아기를 재우고 나란히 앉아 TV를 보다가 남편이 문득 아이돌가수 A군은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본다. A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귀여운 얼굴에 섹시한 몸매, 춤과 노래실력을 겸비한 전천후 아이돌로 한 때 나의 일상을 점령했으며 결혼 후에도 지속적인 앨범 구매를 유도한 인물이다. 결혼 전에는 그를 보기 위해 값비싼 의류나 화장품 따위를 한 뭉치 사들여 팬사인회에 응모하기도 했고 실제로 당첨돼 해외체류 중 귀국 일자를 앞당기는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를 향한 마음은 결혼 후에도 이어져 남편 몰래 같은 앨범을 종류별로 샀다가 핀잔을 듣거나 숨겨뒀던 잡지 스크랩 같은 것이 발각돼 고초를 치른적도 있다.
그랬던 A군의 이름이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돌도끼처럼 먼지를 소복히 뒤집어 쓴 채 눈 앞에 나타나다니. 그가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전혀 모르겠다. 정말 ‘1도’ 모르겠다. 이럴수가, A군 어떻게 지내는지를 내가 이렇게까지 모를 수가 있나? 몇년새 마음이 식었어도 앨범발매 소식은 꼬박꼬박 챙겨왔고 팬 커뮤니티도 들어갔었는데, 언제 아예 잊어버렸을까?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무의식중에 내 입에서 나간 대답이다. 그날 TV를 보며 아기 빨래를 개고 있던 나는 무심코 “몰라, 남의 집 아들 신경쓸 겨를이 어디있어”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애기’였던 A군이 ‘남의 집 아들’이 되어있던 것이다.
나는 신화 2집 ‘YO!(악동보고서)’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나의 덕질 역사에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쿨워터 민우 오빠로 덕질 돌잡이를 한 이후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줬던가. 별달리 오프라인 행사에 가보지 않은 안방팬이기는 해도 하교 후 찾아보는 아이돌 소식으로 고된 수험생활을 이겨냈었는데. 취업 후에는 또 고난의 수습 생활과 지리한 사표 고비를 넘게해준 것이 바로 덕질 아니었나. 그런데 정신차리고보니 내 핸드폰 갤러리에는 단 한 장의 움짤도, 화보 사진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3개월도 안돼 이미 수천장을 돌파한 아기 사진들이다.
맙소사, 내가 이렇게 아줌마가 되었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으로는 와닿지 않았던 그 단어가 해 떨어지듯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깨달음의 순간이 지나자 남는 것은 익숙한 받아들임이다. 입덕 부정기를 지나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매력의 덫에 걸려들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덕후처럼 핸드폰 갤러리를 보며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덕질 레이더가 이제 아기에 맞춰진거구나.
취미생활을 ‘남편 덕질’, ‘자식 덕질’ 이라고 하는 기혼 여성들을 제법 봐왔다. 전에 그런말을 들었을 때는 ‘덕질의 세계를 뭐라고 보는거냐, 가족을 사랑이 어떻게 덕질이냐’고 분개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요즘 나의 행태를 보면 우스갯소리로 ‘자식 덕질’이라는 말이 나올법도 하다. 하루종일 아기 생각만하고 아기 사진과 동영상을 수십수백번씩 돌려보며 쇼핑을 할 때도 아기에게 어울릴 것만 생각한다. 게다가 매일 실물을 볼 수 있고, 직찍을 사수할 수 있으며 내가 원하는 굿즈를 생산할 수도 있는, 학창시절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최상급 덕질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지하게 육아와 덕질의 유사성을 고민하게 된다. 와, 새벽에 밤잠 못이루게 하는 것도 비슷하잖아? 하고.
그래도 정신을 다잡고 생각해보면 아기 돌보는걸 덕질과 같은 선상에 둘수는 없다. 덕질이란 자고로 현실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마약같은 중독성이 있어야하는 법인데 아기는 현실 그자체니까. 나의 ‘남의 아들’ 발언 소식을 전해들은 친구는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며 나의 미래를 예견했다. 그렇다. 언젠가 아기가 내 품을 떠나갈 날, 나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송가인에 열광하고 임영웅에 잠못이루는 5060 슨배님들처럼…다만 그 때까지 남편마저 ‘남의 아들’이 되어버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인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