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린 신경안정제 열다섯 알
그리스 로마 신화에 시시포스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신들을 속인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벌을 받았다. 그의 하루 일과는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밤 사이,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누군가는 인간의 삶이 시시포스의 바위와 같다고 말한다. 각자의 바위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른다. 다음 날, 바위는 시치미를 떼며 그 자리에 있다. 또 바위를 굴려 올린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삶은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간다. '무용한 삶'이다.
삶 자체가 무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려고 애쓰는지도.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기르고, 누군가는 책을 내고, 누군가는 이름을 남기고..
내가 짊어지고 있는 바위는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나는 아내로, 엄마로, 딸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역할들을 하면 할수록, 이건 진짜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재미없는 연극 공연 중이고, 나는 형편없는 연기를 하는 배우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피곤하다며 회사 사람들과 회식을 가는 남편에게 화가 나지만 참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만 찾는 아이들에게도 화가 나지만 (조금만) 소리를 지른다. 왜 안부 전화를 하지 않느냐는 시부모에게도 화가 나지만 사과한다. 애한테 신경 좀 쓰라고 말하는 엄마에게도 화가 나지만 알겠다고 말한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언어를 잊어버린다. 내 생각을 부정하고 싶기도 하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받아들이기만 하면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이혼할 것도 아닌데 열심히 일하고 온 남편 기분 맞춰주는 게 뭐 어때? 네가 낳은 아이들인데 줄 수 있는 건 다 주고, 시킬 수 있는 건 다 시켜야지. 결혼 제도라는 거, 이미 어느 정도 알고 뛰어들었으면 시부모에게 '기본 도리'는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렇게 묻는 실체 없는 나에게 조목조목 반박하다 보면 또 한없이 우울해지고 이유 없이 피곤하다. (남이 보면 인상 좀 펴고 멍 때리지 말라고 하겠지..)
하지만 여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나와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N번방이 어떤 식으로 수면 위로 올라와 확산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 말고도 다양한 성 정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척'하고 그들의 삶과 사랑이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호사, 승무원, 소방관, 보조 연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닷페이스가 문을 닫는다. 콘텐츠들은 아카이빙 된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작년까진 이 매체를 알지도 못했고, 후원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뭐라 말을 보탤 수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너무 아쉽고 아쉽다.
내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일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앞으로 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건 닷페이스 덕분이다. 고마워, 닷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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