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입장에서

내가 버린 신경안정제 스무 알

by 혜윰

애써서 오래 들여다봐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말들이 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순간 문득. ‘아,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싶은. 이사한다는 나의 말에, 시모의 첫마디는 “집이 넓어서 청소하기 힘들겠다.”는 걱정이었다. 그때는 뭘 그런 걱정까지 다 해주시고 그러세요.라고 넘겼지만 매 달 빠져나가는 대출이자를 보다가 아, (우리 아들 힘들게) 왜 무리해서 집을 넓혔냐는 말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나는 말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대화를 할 때 집중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냥 눈치가 없는 건가. 나는 있는 그대로의 말을 믿는 게 좋다. 특히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때는. 일단 기분이 좋다. 나를 좋게 생각해 주다니! 나도 그 사람에게 호감이 생긴다. 한편으로는 뭔가 다른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가 싫다. 마음속의 생각이 상대방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웃음 가득한 얼굴과 친절한 말투와 속마음은 다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돌이켜보면 일을 하면서 거절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렇게 열심히 하던 대로만 하면 원장 자리도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 네, 웃고 넘겼지만 그때부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건 좋은 말 아닌가? 왜 내 기분이 나쁘지? 나는 ‘원장 자리’를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원장이 싫어서 버티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들은 내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의도’로 변질되어 버렸다. 저렇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자기 입장에서 성실성과 가능성을 판단하고 쉽게 단정해버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그렇게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은 꼭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나의 기분 좋음을 틈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간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일을 (오늘도) 떠맡는다. 물론 아주 힘들거나 큰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자신의 사정을 봐주는 나를 ‘좋은 직원’이라 생각할 거고, 나는 그들이 그렇게 여겨주는 게 만족스럽다. 그래, 이만한 일도 없지. 나는 타협점을 찾는다. 아이 둘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오전에는 내 시간도 가질 수 있으니까. 이 정도 스트레스도 없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기는 있나.

글쓰기를 하면서 '진짜 그 마음이 나에게 없나?' 하는 질문이 생겼다. 그게 정말 '다른 의도'인가? 나는 '순수'하게 열심히 내 할일만을 한 건가? 그 '순수'는 뭐지? 나를 자르지말고 계속 나를 믿어달라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입장에서만 쉽게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나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고, 나를 그렇게 판단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내 좋은 대로' 해석한 것이다. 속으로는 나도 이것 저것 재보면서. (짜증나고 부당하다고 여겼지만) 그 부탁을 들어주면 나중에 딴 말 못하겠지. 각자의 입장을 듣고는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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