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분노

by 혜윰

이상하고 이로운 페미

원래는 내가 감기에 걸리게 된 이유에 대해 쓰려고 했다. 둘째 아이가 먼저 감기에 걸렸고, 일주일 동안 유치원에 못 갔고, 아이가 다 나을 때쯤 내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투덜거리며 쓸 예정이었다. 그렇게 몸살 주사를 맞았고, 약 먹고 초저녁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 버렸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켜서 네이버에 접속했는데, 믿을 수 없는 속보가 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들은 더 믿을 수가 없는 사실들이었다. 슬펐다. 내가 엄마라서도 아니고, 그저 한 인간으로서 다른 생명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져 버리는 게. 죽음은 우리에게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말들을 지껄여왔지만,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몰려왔다.




두통은 지속되고, 코는 막혀 있고, 머릿속은 그저 멍한 하루를 보냈다. 그렇지만 나는 교회에 갔고, 파스타 한 접시를 다 먹었고,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셨다. 창 밖 너머로 보이는 단풍 사진도 찍었다. 날씨가 흐렸다. 비가 흩날리다가, 조금 그쳤다가 다시 또 흩날렸다. 점점 늘어가는 사망자수와 터무니없이 좁은 골목을 보면서 점점 분노가 치밀었다. 앞으로 슬픔과 분노는 함께 덩어리 져 굴러갈 것이다. 그렇지만 이 슬픔과 분노의 상대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사회'가 되어야 할까. 기사를 보고 분노하면서도 '아무 일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웃고, 먹고, 내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일까. 이제 그 분노는 나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바뀐다. '슬픔과 분노'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서 진정한 슬픔과 분노의 한 조각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갑자기 이 세상 자체가 싫어진다. 세상에는 이기심과 혐오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타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너무나도 비극적이지만, 거기에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내가 싫다. 나는 더 이상 그들에 관해 말할 자격조차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시 책을 집어 든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려고 할 때마다 찾는 책이다. 이라영의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분노를 하더라도 어떤 감정으로 원천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른 언어가 생성된다. 유도라 웰티의 충고를 늘 떠올린다. 자기 방어나 증오심을 바탕에 둔 분노의 언어는 이 감정으로 다른 세계를 갉아먹으려 한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이 세계의 어떤 방식, 거부하는 문화, 죽는 날까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어떤 '정상' 권력들. 용납하기 어려운 인간들의 행태에 분노하고 이에 반박하는 글을 쓰려할 때마다 심호흡을 한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단지 분노를 토해내는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쓰기에 대한 거창한 의미 부여 혹은 미사여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는 여러 방식의 표현 중 하나다. 다만 허무와 증오로 귀결되지 않고 궁극에는 나와 타자를 연결 짓는 글이 되기를 늘 갈망한다.


나는 분노한다.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읽고, 보고, 쓴다. 수시로 우울하다. 우울함과 잘 살아가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분노와 우울을 오가는 와중에도 오만이 싹튼다. 내 오만을 다스려 무지를 발굴하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단지 분노만 토해내지 않는 글. 나와 타자를 연결 짓는 글.


앞으로도 계속 슬픔과 분노는 나를 찾아오고, 나는 기꺼이 받아들여 한없이 우울해질 것이다. 그때마다 다시 떠올린다. 분노를 관통한 여성의 글들을. 나는 제대로 된 분노를 하는 법을 찾을 것이다. 나를 파괴하지 않고, 남을 파괴하지 않고 분노를 뿜어낼 수 있는 그 길로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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