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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11. 2022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

정한아, <술과 바닐라>

저녁 산책을 하다 주위를 둘러본다. 높이 솟아있는 아파트들, 비슷한 크기의 네모난 창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밝고 선명하다. 그러나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금씩은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정한아의 소설집 《술과 바닐라》는 그 흔들림의 순간을 포착해서 그 속을 벌려 들여다본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작품의 인물들은 조금씩 나의 언어를, 나의 표정을, 나의 모습을 닮아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가족이라는 구조 속의 '여성'들은 어떤 모습일까. 부엌에 서 있는 엄마, 빨래를 너는 엄마, 아이들에게 잔소리하는 엄마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지 못한다. 여성들에게 가족이라는 공간은 '엄마'로서 인정받고 평가받는 공간이면서, 매일 고군분투하며 살아내는 곳이기도 하다. 여성이 딸로서 살아왔던 공간도, 성인이 돼서 꾸려나가는 공간도 그 책임은 결혼을 '선택'한 여성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다. 따라서 직업을 가진 여성이든 가정주부든 엄마로서의 죄책감과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엄마 되기'와 '나 자신되기'는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말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다시, 또 도전하고 또 실패하는 반복되는 싸움이다. 



엄마 되기는 내가 되면 안 돼요.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아이들이 대가를 치르게 되니까. 참 그런 게 아이러니하죠. 아이들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랑이 있는 것처럼 구는데,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기도 벅찬 불완전한 존재들이거든요. 그럼 아이에게 줄 사랑은 어디에 있나, 그 사랑 없음에 매일매일 고민했어요.


<대담-정한아*염승숙>



다시 '사랑'이다. 내가 아무리 아이에게 사랑을 '줘도' 아이는 '만족스럽지 안'다. 내가 '주는' 사랑은 아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이가 원하는 사랑- 너그러움, 이해와 관용, 친절-따위는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올바름, 규칙, 감사 정도인 것 같다. 나의 사랑은 아이에겐 규율일 뿐이다. 아이는 언제나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고 싶어 하고, 엄마인 나는 그게 두렵다. 아이가 게임 속에 나오는, 유튜브에 나오는 그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할까 봐. 그래서 나는 아이를 통제하고,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 애는 이제 당신이 필요 없어. 그게 전부야."


나는 매를 기다리듯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왜 마지막 순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잡아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기고 싶었다. 저 높은 성 위에 가두고 싶었다.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그 애는 ----- 이제 -------당신이------필요-----없어." 라는 문장을 곱씹어 본다. 지금 나는 '이제'와 '당신이' 사이 어디쯤을 지나고 있다. 아니, 첫째 아이는 '필요'라는 단어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결국은 '내가 필요 없음'으로 가야 하는 삶에서 왜 나는 수많은 '나의 필요'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내 일을 하면 그건 왜 '욕심'이 되어야만 하는지.



그때부터 직접 아이를 돌보면서 남는 시간을 쪼개어 원고를 썼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넘어지거나 손을 데거나 그릇을 깼다. 남편은 내게 아이를 맡길 사람을 구하든지,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대체 이제 무슨 욕심이냐고 말했다. 욕심이라는 소리에 나는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술과 바닐라>



그렇게 내 삶의 일부분에 기대어 훌쩍 자란 아이는 이제 집을-나를- 떠나고 싶어 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아이는 엄마의 불안함을 고스란히 느끼고 살았을 것이고, 그 불안함을 자신이 채워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이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 것이다. 율이가 이모님을 기억하지 못하듯. 시원이 아빠가 있는 호주로 떠나듯. 

그러나 기진이 '길을 잘 못 들어섰지만 그 속에서도 길을 찾으며 "검은 허공을 향해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것처럼, 삶은 여러 갈래의 길을 열어놓는다. 엄마로서 얻는 "새로운 감각-관계 맺음을 통한 시야의 확장, 유연함이라는 무기, 물리적 삶의 극복"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처럼.

'엄마'라서 삶이 특별히 힘들거나, 더 좋거나, 더 성숙하고 의미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아이가 아니어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아이가 있는) 엄마의 삶에 관한 '성숙한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필수' 코스라는 것처럼 치부해버린다. 실제로 엄마로서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아이와 나를 방에 넣고 문을 닫는다. 아이의 (순수한) 얼굴을 보면서도 불평할 수 있니? 너는 저렇게 천사 같은 존재를 '낳은' 위대한 엄마니까 당연히 모든 걸 감수해야지.라는 목소리에 맞서서 오늘도 나 자신 되기와 엄마 되기 사이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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