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연, <세계의 악당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법>
일상 생활에서 겪는 부당함, 아, 이건 아닌데 싶다가도 내가 너무 예민한가? 질문하며 그냥 삼켜 버렸던 말들. 누군가 "그 때 너의 감정은 이래서 그랬던 거야.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나는 이 책, 《세계의 악당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법》을 만났다.
저자는 SF작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SF소설이 아니라 여러 지면에 썼던 칼럼, 수필, 해설(작품 소개)를 담고 있다. 작가가 말했듯 이 책에는 "전업 작가일 때, 겸업 작가일때, 변호사일 때 쓴" 글이 두루 실려있는데, 그래서인지 사회적 사건에 관해서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어쩔 수 없이 소비를 하면서, 착취에 발을 들이게 된다"라는 문장에서는 ‘물건'을 소비하면서 '친절한 웃음'까지 원하는 한국의 서비스를 들여다 보게 된다. 또 차별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이주노동자나 난민의 실제 삶이 어떤지 조금은 추측할 수 있다. 작가는 난민에 대한 공포가 사회에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현상을 보며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타문화와 난민, 이주민에 대한 교육과 정책이 부족하고, 그 사이의 공백에서 무지와 공포가 샘솟아 혐오를 확산한다고 진단한다. 어떨 때는 모르는 것이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악성댓글의 비하표현이 '설명할 수 없지만 불편했던' 이유를 잘 풀어낸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요즘에는 타인을 공격할 때 간접적으로 모멸감을 주는 비하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다. 댓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쿵쾅쿵쾅'이라는 댓글을 고소한 이유를 수사관이 물었다고 한다. 쿵쾅쿵쾅은 멧돼지처럼 뚱뚱하니까 쿵쾅쿵쾅 걸을 것이라는 의도를 담아 쓴 비하표현이다. 작가는 "이런 비하 및 차별 표현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가벼움을 위장한다. 둘째, 변명의 여지를 남긴다. 셋째, 악의의 유대를 형성한다." 라고 설명한다.
나는 솔직히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수화를 배웠다며, 노래를 부르며 '산'이라는 뜻의 수화 동작을 계속 반복하는 아이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니? 라고 물으면, 이건 욕이 아니예요. 수화로 산이라는 뜻이예요. 라고 대답하며 반 전체 아이들이 킬킬대고 웃을 때. 그 아이는 그 동작이 정확히 '욕'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이 아니고' 수화라고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할 때. 나는 누군가의 의사소통 수단인 수화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서 정색하고 장애인 차별이 옳지 않다고 일장연설을 할 수는 없었기에, 여기에는 수화로 대화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만 두라고 했다. 사실 이것도 나의 변명일 수 있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너무 불편했다.
"쿵쾅쿵쾅 걷거나 뛰는 것은 아주 많고, 대부분 딱히 부정적인 맥락이 없다. 이처럼 비하 표현은 이미 널리 쓰이는 친숙한 단어나 이미지를 훔쳐 그 악의의 무게를 숨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처럼 산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알지 못했던 사회의 여러 이슈에도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은 힘들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대방을 생각한다는 것.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과도 같다. 작가가 함께 한국어를 공부한 이주여성에 관한 글을 썼지만 그들은 이 글을 읽지 않을 거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인 한국어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글을 쓰는 것. 그게 이 작가가 글을 쓰게 되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작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해야 하는 일을 시작하고서 나는 무엇에 대해 쓰고 싶은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요즈음은 언어가 부여되지 않은 경계 너머를 말하고 싶다. 한국 사회를 공고하게 둘러치고 있는 경계의 안으로 아직 충분히 말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끌고 올 수 있다면 좋겠다. 전형의 안에 수십만 명의 삶이 요동치고 있다. 나는 어떤 무지는, 당사자의 책임이 아닐지라도, 올바르지 않다고 믿는다.
제목마저 멋진 <말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한 부분을 마저 옮긴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려면 끝없이 힘을 내야 한다.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사회적 발언에 '여자니까'라는 해석이 한 겹 더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한국에서 말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 각오를 하고, 그래도 다음 세대에는 여성 한 명의 자리가 더 있기를 바라며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듣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나에게는 힘이 필요하다. 견딜 수 있는 힘. 계속 할 수 있는 힘. 도전 할 수 있는 힘. 힘을 내고 각오를 다지는 건, 지금 당장의 나에게도 필요하지만, ‘미래’를 살아갈 여성들에게 ‘힘을 내는 내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