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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24. 2022

분명히 있지만 보이지 않는

-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프라이어를 보며 나는 내가 아직도 그 제도를 상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리기 어려운 습관이었다.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백인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피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작가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시선으로 (진짜 미국인인) 백인 사회를 바라본다. 그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백인의- 인정'을 위해 살아왔다는 사실을, '고분고분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마주 보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갈등은 책을 읽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상하게도, 그런 작가의 삶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나와 어딘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얌전하며 예의 바르고 똑똑한 여성으로서의 삶.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게 나의 거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남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언제나 웃으며 수용하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 


인정욕구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성은 그 자체로 사회에서 '인정'이 된다. 여성은 크게 말해도, 작게 말해도, 아예 말을 하지 않아도 인정받지 못한다. 여성들은 그게 '나 개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말을 '너무 세게' 해서 상대방이 기분이 상해서 그래. 내가 '우물쭈물' 말해서 나의 의도를 알아듣지 못했을 거야. 내가 참고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모르는 거지. 그렇게 나를 향한 비난과 화살은 고스란히 다시 나에게 와서 쌓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고통이 짓무르다 못해 터져 나오면, "갑자기"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너만 힘든 게 아니고 나도 힘들단다.



'백색'을 인식하고 나면, 다시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제 너무 흔한 비유가 되어버린, 빨간 약과 파란 약처럼. 작가는 "어디를 가든 백색을 본다." 여기서 작가는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예로 든다. 등장인물들의 눈이 멀 때, 시야가 캄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을 뜬 채로 우유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하얗게 변한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영화의 포스터를 떠올렸다. 주인공은 눈을 뜨고 있지만 '하얗게 변해버린' 눈은 앞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 역시 '하얗게' 변해버린다. 작가는 그 하얀 '얼룩'이 나의 삶을 남한테 끊임없이 사과하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나는 '이상하게' 남자들'만' 있었던 상황이 떠오른다. 그때는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TV 예능 프로그램에 남자들'만' 나와도, 여자 아이돌은 아침을 깨워주고, 아침밥을 해 주는 '엔젤'로 나와도. 자신이 저지른 도박을 아무렇지 않게 '웃음 코드'로 써먹는 장면을 봐도. 영화에서 모험을 하는 주체는 항상 남자 주인공이었어도. pd들은 남자였고, 작가들은 여자였어도. 





작가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을 살기 위해 '무엇이 희생되었을까?'라고 질문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 정권과 베트남 전쟁. 나는 이 '사건'들을 알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또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인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도. 알고 있다는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읽었을' 뿐이다. 작가는 자신이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 모든 것을 '빚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무슬림이나 트랜스젠더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다행히 심한 감시 속에 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일종의 연성 파놉티콘 속에 산다. 이것은 아주 미묘해서 우리는 이것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감시하며, 바로 이것이 우리의 조건부 실존을 특징짓는다. 우리가 여기서 4대째 살았어도 우리의 지위는 여전히 조건부이다.





연성 파놉티콘. 

파놉티콘이란 일종의 감옥이다. 가운데 감시자가 있는 타워가 있고, 그 타워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싼 감옥이 있는 형태이다.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건 감시자가 있는 타워를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죄수는 그곳에서 감시자가 자기를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시선'으로 인해서 죄수는 '통제'된다. 아시아계 '미국인'인 작가의 "우리의 지위가 여전히 조건부"라는 문장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또'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하대 학생이 죽었다. 그런데도 '여성'가족부 장관은 젠더 문제가 아닌 '안전'문제라고 못 박는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 책을 맺는다. 아니, 어쩌면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나라에 늘 있었던 존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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