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담, <돌보는 마음>
어쩌면, 누군가는 지겹고 지겨운, 그저 그런 가족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자의 엄마가 평생 해왔던 돌봄 노동으로 자란 나와 남편이 얼마나 “더” 희생할 수 있을까? 그저 받기만 하면서 자라왔는데?
책을 읽으면서 가족의 일상이 그저 ‘굴러가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끊임없고 반복적인 돌봄 노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절히 느꼈다. 그건 엄마가 평생 ‘습관처럼’ 해와서 어렵지도 않은 일이며, 내가 공기처럼 익숙하게 받아왔던 일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불평 하나 없이 그 많은 가사노동을 해왔으며, 지금도 하고 있을까.
그들이 부와 성을 대물림하는 동안 나는 무엇을 얻는 거지? 공의 할머니가 공의 어머니에게 물리고, 공의 어머니가 내게 물리는 삶. 그러면서도 요즘 여자들은 옛날에 비해 팔자가 늘어졌다는 평가를 윗세대 여성에게 받는 삶 ……. 그것은 대물림이라기보다는 ‘대물림’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나. 아니면 되풀이나 대갚음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는 뒷덜미를 세게 물린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안>
평론가 허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해 가족을 지킨다는 명예와 뿌듯함이, 가족이야말로 여성의 자리라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이 돌봄 노동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는 여성들 자신을 소외시키고 만다.”라고 설명한다. 평생을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아온 그들은 돌봄 노동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했던 돌봄 노동 때문에 정작 자신은 돌봐줄 사람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인물들은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한다. <안>에서 비난을 감수하고 이혼을 결심하는 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워킹맘인 미연, 그리고 졸혼을 선언한 희숙도. "돌봄과 희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들"(허윤의 평론 중)이다.
3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집의 3부는 '노인의 돌봄'에 주목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종종 들렀다. 장남인 아빠는 일요일마다 꼭 할머니를 보러 갔고, 일이 있으면 엄마 혼자 보냈다. 작품을 읽는 동안 그곳의 공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마치 시간마저 지겨워서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얼굴에는 심심함과 권태가 어려있었다. 그렇다고 그곳이 썩 나빠보이지도 않았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주 조용했다.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심한 분례는 아들에게 "결국엔 내도 마지막엔 일로 와야겠제."라고 한숨 쉬며 내뱉는다. 오십일곱인 아들이 대답한다. "지도 마찬가지입니더. 다 똑같습니더." 병원 로고가 새겨진 분홍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하얗게 센 머리를 숏컷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위에 하나씩 겹쳐지는 얼굴들, 우리 아빠, 우리 엄마, 그리고 나. 그건 슬프고 끔찍한 일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일일까. 왜 사회는 자연스러움’을 이토록 거부하게 만드는가. ‘젊은’ 피부를 위해 내가 지금 바르고 있는 화장품. 건강을 위해 먹고 있는 영양제. 어쩌면 거대한 산업이 만들어낸 ‘생각’이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늙으면 추하고 쓸모없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작가의 말에서 김유담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 내게 그 두 가지 외 다른 정체성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그가 ‘돌보는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가족의 면면이 ‘쓰는 사람’을 통해 민낯을 드러낸다. 돌봄을 받고 자란 우리는 (엄마의 시선에서) 당연히 받은 만큼 돌봄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시가에도 자주 안부 전화를 드리는 며느리가, 집은 항상 깨끗하고 깔끔하게 유지하며, 일하며 돈을 벌던지 집에 있다면 재테크에 밝아야 하고, 아이의 건강(몸과 마음)과 공부를 책임지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 없다. 아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안>에서의 문장을 빌려와 말한다. 그 이유를.
하지만 큰엄마는 죽어서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큰엄마가 겪은 것의 10분의 1에도 가닿지 못할 일들을 견디지 못하고 공과 헤어지려는 이유를.
나는 그것이 내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공부를 덜 해서, 고소득 전문직이 못 된 탓이라고 했고, 큰엄마는 내가 공부를 너무 한 게 문제라고 했다. 심지어 공의 엄마는 내가 친정에서 제대로 못 배우고 자라 이 모양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일일이 바로잡기는 어려웠다.
큰엄마 안금자, 친엄마 정은주, 공의 엄마 윤혜숙까지 세 엄마의 삶과 부딪치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고, 나는 그저 그들과는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