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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15. 2022

가녀장이 말했다, 이제 나의 시대가 왔노라고.

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책을 펼치자, 단정하게 눌러쓴 글씨체의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저자 사인본일 줄은 몰라 당황했던 1인)



지나간 시대의 어른들과

새 시대의 동료들을

복잡하게 사랑하며

이 드라마를 바칩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사랑고백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슬아라는 작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이 끊임없이 샘솟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건, 그와 연결되어 있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자의 시선일 것이다. 그래서 가부장이 아닌 가녀장이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겠지.



재미있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낮잠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슬아이고, 글을 쓰는 작가가 (헤엄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슬아라는 사실을 (거의 모든) 독자가 알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리며 읽는다. 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가면서부터 어느새 나는 이슬아가 아닌, '가녀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가녀장은 가부장제 아래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통쾌함을 안겨준다. 가녀장은 복희를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정직원으로 고용했으며, 당연히 웅이보다 월급도 높다.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 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 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살림만으로 어떻게 하루가 다 가버리는지, 그 시간을 아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에 그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 속에서 우리가 '글'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밥'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여러 장면에 걸쳐 웃기고, 재미있고, 슬프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물론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글은 밥을 하는 일을, 밥을 해 주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존경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글을 사랑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할아버지를 닮을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모습도 나타나게 된다. 어쩌면 내 삶도 다를 것 없다. 엄마가 나를 키웠던 방식, 내가 여자로 나고 자라며 차별받았던 순간들, 학교를 다니면서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을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다짐했지만, 결국 나도 그 틀 안에서 이리저리 충돌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지." 자조하며 세상과 조금씩 타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가녀장은 그런 나를 비웃거나 잘못됐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같이 한 번 고민해보자고 손을 내민다.




슬아는 여성인데도 종종 복희의 부엌과 음식을 소외시키지 않았던가.


수많은 할아버지들처럼. 아버지들처럼.


우리 할아버지는 언제나 이것에 실패했지. 부엌 일하는 사람을 귀하는 여기는 것에, 언제나 실패했지. 복희가 차린 밥을 매일 대접받으면서도 그랬지. 슬아는 자신이 가부장의 실패를 반복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가족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들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들에겐 좋은 것만을 반복하려는 의지가 있다.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반복하지 않을 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는 의지, 사랑의 힘으로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꿈꾼다. 더 다양하고, 더 가녀장스러운 또 다른 가능성을. 그래서 가녀장은 오늘도 첫 문장을 쓰고, 다시 지우고, 또 다시 쓴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너'들을 위해.




삼십년간 너무나 많은 이유들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좋은 너. 미운 너. 웃긴 너. 우는 너. 아픈 너. 질투나는 너. 미안한 너. 축하받아 마땅한 너. 대단한 너. 이상한 너. 아름다운 너. 다만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인 너. 동물인 너. 죽은 너. 잊을 수 없는 너. 그런 너를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먹고 기억하는 나. 문학의 이유는 그 모든 타자들의 총합이다.




* 글 발행전 맞춤법 검사에서 가녀장이라는 단어가 오류의심이라고 뜨는 것을 보니 너무 재미있네. 이렇게 오류가 의심되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많이 나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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