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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30. 2022

자고로 공주의 언어란

정보라, <여자들의 왕>

그리스 로마 신화에 '피그말리온'이야기가 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상상했던 이상형의 모습 그대로 조각을 하고 갈라테아라는 이름도 지어준다. 아프로디테에게 갈라테아를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소원을 빈다. 소원이 이루어져 갈라테아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갈라테아는 피그말리온이 마음에 든대? 


신화 속에서 갈레테아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만드는 것도 피그말리온,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피그말리온,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기도)이다. 아, 만들어도 줬고, 이름도 지어 줬고, 생명도 줬으니까 닥치고 내 말만 들으라고?  


가만히 돌이켜보면 공주에게는 언어가 없었다. "네" 또는 "좋아요." "그래요." 말고는. 정보라는 공주에게 말 할 기회를 준다. '기회'를 줬을 뿐인데 책 한 권이 탄생하다니. 


이 책은 나오기도 전부터 "남자 죽이는 여자들 이야기"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는데,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읽어주시면 좋겠다. 여자들도 상상의 주인공이자 중심이 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상상의 중심을 여성으로 옮기면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어진다. 독자 여러분께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면 좋겠다. 

- 작가의 말


이 책은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이다. 영웅의 이야기를 공주와 용의 시선으로 다시 쓴 이야기 세 편이 이어진다. 자신을 구하러 온 기사에게 공주는 "말로 할 때 곱게 나가라." 라며 칼을 겨눈다. 설상가상으로 잠들어있던 용까지 깨어나고, 기사는 퇴로를 모색해보지만 이 길도, 저 길도 쉽지 않다. 결국 기사는 공주에게 "옛 정을 생각해서" 살려달라 부탁한다. 

공주는 똑바로 누운 기사 위로 다가와 다시 칼을 겨눈다. 

"아무래도 죽여야 겠다."

공주는 아까처럼 입 끝을 한쪽만 올려서 씨익 웃는다. 

<높은 탑에 공주와>

이런 공주의 모습이 '새롭다'라고 적으면서 조금은 슬펐다. 살아오면서, 그리고 딸을 키우면서 수많은 공주를 만나고 또 만나왔는데... 왜 우리가 공주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다 비슷한 걸까. 작가의 말처럼 여자들도 상상의 주인공이자 중심이 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훨씬 더 재밌다. 항상 듣던 이야기에 구도만 조금 비틀었는데도 이렇게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면, 이제까지 얼마나 비슷비슷한 영웅과 기사이야기를 읽고 자라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신화와 역사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왜 다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다른 단편들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은 <사막의 빛>이다. 읽으면서 이상하게 주인공 소녀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고, 배경도 잘 그려지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상인이 협박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아무도 소녀를 폭력적으로 대하지 않고, 소녀가 머물던 왕궁의 나이 많은 왕이 나는 이미 나이가 많으니 바라는 게 없고, 네가 있던 곳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말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왕이 죽음을 맞이하고, 소녀는 자유롭게 돌아가게 되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말에서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한 후에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슬람 문화와 중앙아시아의 지형에 얼마나 약한지 알았다. 

소녀가 돌아온 날로부터 사흘동안 비가 내렸다.

마침내 비구름이 걷히고 대기를 가득 채웠던 은빛 물방울이 엷어져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을 때 소녀는 물었다. 

"너는 누구야? 어째서 나를 도와주는거지?"

푸른색과 은색으로 빛나는 물줄기가 대답했다.

-네 몫의 음식을 나눠주었으니까.

물줄기가 공중에 하나로 길게 모였다.

-함께 사막의 밤하늘을 바라보았으니까. 

<사막의 빛>

'고전'이라고 불리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전해진걸까. 우리는 왜 아무 의심없이 비슷하고, 비슷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신나고 재미있는 청소년의 필수 교양서'라고 믿으며 읽어온걸까. 시선만 조금 바꿔도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런 단절의 밤에 나는 오래전 잊혀버린 언어로 기록된 누군가의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읽었다. 조각난 시간의 연대기를 한 단어씩 나의 언어로 바꾸었다. 죽음과 시간과 망각 앞에서도 어떤 이야기들은 살아남는다. 시간이 흐르면 죽어 잊힐 인간에게 그것은 커다란 위로가 된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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