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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Apr 19. 2020

(16) 화려함을 사랑하고, 간결함을 사랑하라

'글 잘 쓰기 위한 10가지 법칙' 의 함정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는 주장, 지시, 간섭, 방침, 안내는 어느 분야에나 다 있습니다. 예술에서도, 기술에서도, 주방 기기 다루는 법에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우리는 접하지요.


이렇게 하는 게 좋고 저렇게 하는 게 좋다는 이 지향들은 때로 상충합니다. 단백질 위주 식단은 대체 건강에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다행히도 이런 질문에는 개인의 건강 상태와 구체적인 식단 종류를 면밀히 분석하면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림에서는 어떻습니까? 빛과 그림자를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할까요? 아니면 그림은 사물의 변하지 않는 정신을 표현해야만 하는 걸까요? 지금껏 예술 사조가 흘러온 날들, 문화권 사이의 차이 등을 고려해서 보면 우리는 답을 알 수 있습니다 : 그것은 시대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 다르다.


인상파의 기념비적인 시작이라는 클로드 모네의 <인상-해돋이> 가 전람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림도 아니다' 라며 비판을 들었었는지요!

 

하지만 주장이란 꽤 힘이 센 것입니다. 세상에 여러 갈래로 퍼져 있는 각각의 주장들은 그것으로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만큼 수많은 근거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시킵니다. 저번 편에서 가연성 씨가 소개한 아돌프 로스의 저서 <장식과 범죄>도 700페이지짜리 책이잖아요?


시대 안에 있는 개인인 우리들은 특히나 자기 분야의 일이 되면 거장의 조언 앞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이렇게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서 하는 주장인걸요. 거부하기는 어렵고 감명받기는 쉽습니다. 아, 이렇게 해야겠구나. 나는 지금까지 잘못 하고 있었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되지요.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주장은 다 하나의 주장일 뿐인데 말입니다. 






넘치는 장식을 미워하기로 유명한 예술 분야 가운데 문학이 있습니다. 글을 쓰려고 해 본 분들이라면 대부분 '간결하게 써야 한다', '좋은 글을 위해서는 문장에서 성분을 덜어내야 한다' 는 등의 조언을 들어 본 적 있으실 겁니다. 1900년대 중후반의 유명한 작가들―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전체 사실에서 오직 1/8만을 서술한다는 빙산 이론*에 입각해 글을 썼고, 단편소설의 대가라 불리는 레이먼드 카버는 일상의 간결한 언어들만을 써서 문학을 하겠다고 말했지요. 


지나친 수사(修辭)를 경계하라는 조언은 그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도 발견됩니다. 이런 사조를 이어받아 현대 글쓰기 교본들은 형용사와 부사를 죄악시합니다. 달콤한 죄악―마치 사탕을 많이 먹으면 이가 썩는다는 경고처럼요.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는 대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다. 자신의 논점이나 어떤 심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부사는 민들레와 같다. 잔디밭에 한 포기가 돋아나면 제법 예쁘고 독특해 보인다. 그러나 이 때 곧바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이튿날엔 다섯 포기가 돋아나고… 그 다음날엔 50포기가 돋아나고… 그러다 보면 여러분의 잔디밭은 철저하게, 완벽하게, 어지럽게 민들레로 뒤덮이고 만다.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그리고 이 책에서는 어떻게 문장에 불필요한 부사가 덧붙어 있고 그 부사를 제거해야 하는지를 꼼꼼히 예문까지 들며 부사 제거의 이유와 방법을 독자들에게 전수합니다.


문장에 형용사와 부사가 많은 것은 곧 당신 정신의 무름을 반영한 결과다. 문장이 쓸데없는 감정으로 넘쳐나고 사실의 핵심을 전달하지 못한 채 치렁치렁하다는 것은 곧 당신 마음이 흐트러지고 정신이 느슨하다는 징표다. 그걸 부정하지 마라.

(장석주, 나를 살리는 글쓰기)


아아, 이 엄청난 부사 박해의 물결! 검색으로 찾아 보면 세상에는 <글쓰기에서 빼야 하는 부사 목록> 까지 돌아다닙니다.


글쓰기에서 빼야 하는 부사 목록 : 


너무, 우선, 대개, 다소, 어김없이, 틀림없이, 가까스로, 완벽하게, 그러니까, 넌지시, 무심코, 시종일관, 부디, 거의, 때로, 중요하게, 모든, 정말, 매우, 철저하게, 굉장히, 놀랍게도, 굳이, 엄청.



이런 '번잡한' 부사들 때문에 표현하고 싶은 내용이 묻혀서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된다고요. 글쓰기를 좀 연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목록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이제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쓴 글에 부사가 너무 많지 않았나를 재빨리 점검합니다. 뺍니다. 역시 부사가 의미를 가리고 있었어!


저는 꽤 반골 기질이 있어서 이런 걸 보면 괜히 반대로 뒤집어 보고 싶어집니다. 부사를 듬뿍 넣은 문장을 한 번 써 보죠.


'때로 나는 어김없이, 틀림없이, 넌지시, 무심코 고개를 돌릴 뻔 했다가도 가까스로, 철저하게,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는 듯이 무관심을 흉내낸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어지럽도록' 부사가 많이 있다는 점에서부터 화자의 마음이 '어지럽다' 는 것을 느낍니다. 이 사람은 몸에 밸 정도로 무언가에 익숙해 있는데(어김없이, 틀림없이, 넌지시, 무심코), 그것을 거부해야만 하는 모순 속에서 몸부림치고(가까스로) 노력하고(철저하게) 진심을 속이려는(정말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어쩌면 실연을 당해서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상황에 있을지도 모르고, 애착을 가졌던 것을 외면해야만 하는 복잡한 사건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건 이렇게 되면 이 문장에서 부사는 의미를 가리는 성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미의 정수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때로 민들레 밭처럼 어지럽고 정리되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지요. 민들레 밭을 표현하기 위해 민들레만큼 필요한 것이 있을까요?


정돈된 서양식 정원에서 민들레는 잡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민들레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하는 법입니다.


오히려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부사 함량 50%의 이 문장은 헤밍웨이가 말한 빙산 중 드러나는 1/8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망설이고 배회하지만 결코 속내를 다 털어놓지는 못할 때 독자는 거기에서부터 인간의 고뇌와 운명에 대한 비극적 패배를 체감할 수도 있습니다.






요점은, 단어의 종류에는 원죄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느냐입니다. 장식은 의미가 되기도 하고 의미의 겉껍데기가 되기도 합니다. 자기 표현이기도 하고 에로티즘이기도 합니다. 잔뜩 덧붙였을 때 야해지지만 오히려 그 끝에 순수한 마음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하던가요?


위에서 인용한, 부사를 권하지 않는 글쓰기 책에는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 죽은 자들과 부재한 자들을 불러낼 때조차 사실의 핵심을 바로 쓰고, 인과관계를 명확히 하는 문장을 써라. 이발소에 걸린 복제 그림같이 영혼의 울림이 없는 상투적인 문장을 쓰지 마라. 

(장석주, 나를 살리는 글쓰기)


이것이야말로 실은 핵심입니다. 극과 극이 서로 통하는 이유는 한쪽 극의 출발점에서부터 반대 극의 끝점까지 도달하는 동안, 그 하나를 둘러싼 여정에서부터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의 영혼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꾸미고, 꾸미고, 꾸미다 보면 그 꾸미는 미의식이 바탕하고 있는 순수한 대상의 존재감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전혀 꾸미지 않은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어진다면, 그러나 장식의 기쁨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작가만 해도 얼마나 많은 다른 종류의 문장들을 쓰는지요? 책 한 권을 낱낱이 들춰 보며 세어도 문장 부호란 온점밖에 보이지 않는 차분한 단문으로 유명한 작가, 문장 하나가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화려한 만연체로 유명한 작가. '고유한 우리말' 을 살려서 써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번역 투' 를 대단히 유려하게 구사하는 점이 작품의 특징인 작가도 있습니다. 무엇이 범죄이고 무엇은 범죄가 아닙니까?


'야하다' 의 어근은 풀무를 뜻하는 '야(冶)' 자를 씁니다. 사전에서 '풀무 야(冶)' 를 찾아보니 이 글자에는 '풀무, 대장간, 꾸미다, 장식하다, 예쁘다' 라는 뜻들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도 마찬가지로군요. 꾸미고자 하는 마음, 인간의 표현 욕구는 에로티즘과 연관이 있습니다. 


에로스는 누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입니다. 말하고 표현하고 사랑하고 싶은 욕구. 그것을 제대로 발산하는 법. 장식이 범죄가 아니고 표현으로 가득한 세상이 감옥이 아니게 되는 법. 그것은 선망이 껍데기가 되지 않을 때입니다. 상투적인 것, 복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솔직한 꾸밈일 때, 표현은 범죄 아닌 예술이 됩니다. 


간결함을 사랑하고, 또한 화려함을 사랑하는 일. 상충하는 모든 지시가 실은 공존하는 표현의 유토피아가 돌아보면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 : "작가가 자기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생략할 수 있으며, 작가가 충분히 진실되게 글을 쓰고 있다면 독자들은 마치 작가가 그것들을 진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빙산 이동의 위엄은 오직 팔 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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