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합니다. 특히 예술 감상에 있어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부담은 그 어떤 경우보다 큽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술 감상의 본질이 예술의 ‘해석’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술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해석의 과정은 필수 불가결합니다. 네, 오늘의 주제는 바로 ‘해석’입니다. 과연 해석이란 무엇인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해석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해석학(Hermeneutik)의 개념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해석학은 이름 그대로 해석, 특히 텍스트의 해석에 대한 이론입니다. 서양에서 해석학의 역사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현실적인 방향으로 해석하여 풀어내는 전통에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신은 결코 우리에게 직접 계시를 말하지 않습니다. 헤르메스를 거쳐서든, 또는 신의 사자 헤르메스의 말을 전해 들은 예언자의 말을 거쳐서든 (해석학의 독일어명 Hermeneutik은 그리스의 신이자 신의 사자 역할을 하였던 헤르메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신은 누군가의 입을 빌려, 그것도 매우 모호한 단어로 그 뜻을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해 들은 말에서 신의 의미를 해석하고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해석학의 시작입니다. 문학의 영역에서 본다면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 백 년 간 쌓여온 각종 신탁의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라 볼 수 있는 그리스 신화는 단순한 신의 뜻을 전달만 하는 역할이 아닌, 일종의 신과 인간 사이의 통역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 볼 수 있죠. 그렇기에 해석이 없는 신화는 단순한 암호로 남습니다.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선 이 암호를 풀어야 합니다.
이러한 해석의 전통은 시간을 거쳐 다시금 서양인의 문화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문제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과 방향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대의 신학자들은 기존의 신앙에 의지한 비유적인 성서 해석에 대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18세기 독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보편적 해석학의 개념을 정리하여 성서를 해독하고자 하였습니다. 언어 그 자체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관점, 타인의 관점, 저자의 의도를 모두 고려하고 비교하여 내놓는 종합적인 해석으로 텍스트의 완전한 이해를 찾아낼 수 있다는 그의 이론은 신학의 영역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해석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100년 후, 독일의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의 전통에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영향을 받아 해석학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가다머에 따르면 예술의 이해는 이미 예술작품과의 만남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예술작품은 그 존재로 이미 스스로 이해를 요구하고, 그러기에 해석의 목적은 예술작품과 해석자의 상호 이해에 달려있고, 이 상호 이해는 바로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독서’라는 행위에 의해 성취됩니다. 이때 문학 텍스트에 대한 작가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만나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게 되죠.
사실 해석학은 텍스트 안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들의 총집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해석을 하는 수용자의 입장 없이는 해석학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결국 이 해석학은 누구를 위한 도구인가, 바로 깨달음을 원하는 수용자입니다. 델포이의 신탁을 받는 그리스 시민도, 눈이 빠져라 성경을 읽는 신학자도, 소파에 앉아 문학을 읽는 독자도 같은 수용자의 입장에서 겸허히 그 의미를 찾는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지만, 그 진리를 전부 다 본 사람은 없습니다. 앞서 나간 자의 등만을 보며 그 뒤를 쫓아가기 위해 빨리 많이 걷기보단 그보다 더 멀리 이어진 자신의 지평선을 보며 지치지 않도록 자신의 속도로 걸어 가보면 어떨까요. 각자 다른 지점에 있더라도, 예술을 감상하는 우리는 모두 해석의 순례자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