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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Jul 11. 2021

(34) 가장 고귀한 집안일에 대하여

나를 세상과 이어주는 노동의 순간


제 많은 취미는 소위 여성적인 것들입니다. 자수, 레이스 뜨개질, 바느질과 함께 다도와 요리와 가사를 즐기고 있지요.


반짝반짝하게 닦은 부엌에 햇볕이 드는 아침은 정말 멋집니다. 잘 말려서 세워 놓은 도마, 모든 도구가 제자리에 걸린 조리대, 반들반들 손을 탄 그릇과 새로 빤 차 수건은 저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주부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가사 노동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월 200만원이 넘는다고 하지요. 실제로 생활 공간 하나를 돌보는 일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집안일' 이라는 것에 포함된 업무가 얼마나 많고, 세세하고, 끊임없으며 종합적인 관리 능력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사를 포함한 여성적 노동, 또 수 놓기와 같은 여성적 취미는 상대적으로 폄하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과 천에 관련된 여성들의 노동은 기계 방직이나 컴퓨터 자수와 같은 것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까지 경제의 큰 부분을 조용히 지탱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산업 혁명 이전, 의복은 대단히 돈이 많이 드는 생활 요소였고 한 사람의 바느질은 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의 수입 요소였으니까요.



전에는 옷 한 벌을 만들려면 실을 뽑기 위한 원료를 구하는 데서부터 그 원료를 가공하고, 실을 뽑아내고, 다시 그 실을 표백하고, 염색하고, 천으로 짜고, 바느질을 하는 모든 과정을 손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한 벌의 옷이란 그야말로 수공 노동의 집약이라, 웬만한 사람은 일생 가지는 새 옷을 손에 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생산 공정에 기계가 도입되면서 이제 만인의 것이 되었습니다만, 또한 그렇게 본격 자본주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인류에게는 퍽 우울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노동에서의 소외입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 노동 소외 개념은 간단히 말해,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직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 내가 하는 일은 직접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니지요. 거래하는 회사의 회계 문제든 모르는 사람이 부친 소포 배달이든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혹은 주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임금을 받기 위한 일입니다.


현대 직장에서는 끊임없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돈 받으니까 일하는 거지 일에서 무슨 보람이며 사명감을 찾으라는 건지, 그런데 이렇게 하루에서 출퇴근 포함 절반이 넘는 시간을 일하는 데 쓰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가 있기는 있는 건지, 등등.


하…기 싫다…….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 순간들은 또 그렇게 거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이번 달 업무 생산량이 얼마나 늘었다거나 하는 지표에서 보람을 느끼기보다 오늘 몇 개가 겹친 업무를 근무 시간 안에 쪼개 넣어서 훌륭히 처리했다거나, 시간 안에 안될 것 같았는데 기지를 발휘해서 어떻게든 해 냈다 같은 사소한 자신의 업적에 기뻐하곤 합니다. (누가 칭찬해 주지도 않는데 말이죠!) 왜냐하면, 필시, 이런 보람은 '내가 직접 하고 있는 일' 에 해당하기 때문일 겁니다. 나에게서 먼 어떤 수치로 된 결과물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일이지요.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활용했는지, 중간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일을 어떻게 배분해서 처리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는지 같은 사소한 점들이 모두 일하는 나의 통제 안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기쁨은 '임금으로 소외당하지 않은 나의 아주 조그만 보람' 입니다.


가사로 돌아와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집안일을 하는 동안은 삶이나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관한 의문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보다 테이블을 반짝반짝하게 닦고 그릇을 잘 말리고 빨래를 주름지지 않게 터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치워진 테이블에는 물건을 얹을 수 있고 그릇을 말려서 넣으면 찬장에 곰팡이가 피지 않고 빨래를 주름지지 않게 하면 저는 주름지지 않은 옷을 입을 테니까요.


정원 치우기


가사는 참으로 직관적인 노동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내가 있는 장소를 쾌적하게 만들기 위함이고 요리를 하는 것은 내 입에 들어갈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적소에 필요한 청소 도구를 사고, 선반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 곳에 선반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편리함은 생활에서 바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노동이 가진 본래 가치였습니다. 노동은 인간을 위한 일이고, 인간은 노동하면서 자신이 세계 속에 있음을 몸으로 느낍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욕실은 사용하면 더러워지고 바닥은 닦으면 깨끗해집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세상에는 결과가 생깁니다. 살아 있으면, 부산물이 생기고, 나는 살아 있는 내가 좀 더 쾌적하기 위해 여러 가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존재의 기본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존재는 삶이며, 가사는 그래서 곧 삶과 가장 가깝습니다. 나를 돌보기 위해 일하는 동안 우리는 삶 속에 있기 때문에 굳이 삶의 의미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외된 노동 속에서 존재에 대한 의문에 빠지기보다 살아 있는 것 자체에 뿌리를 내리고 좀 더 단단한 인간이 됩니다.


직장에서 더 많은 소득을 올리기 위해 가사마저 전담 업체를 불러 처리하는 경우도 최근에는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워낙 일이 많고 바쁘니 집안 정리는 차라리 돈을 주고 맡기는 편이 계산상 낫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몫의 존재를 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랍니다. 효율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를 위한 노동은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사야말로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고귀한 노동이자, 또한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라고 주장하려 합니다. 삶을 만들기 위한 집안일은 성별에도 직종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감당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그렇게 모두는 각자의 삶을 꾸릴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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