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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Sep 07. 2020

(28) 실험실의 뮤즈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수많은 비-과학을 찾아서


 우리가 느끼는 기분 중 대부분은 과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슬픔이나 기쁨도, 바쿠스의 도취감도,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며 어떤 물질은 진정 작용을 하고 어떤 물질은 사람을 충동적으로 만든다, 하는 사실들이 현대에는 이미 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밝혀져 있지요.


 디오니소스는 아폴론과는 또 다른 영역에서 예술가들에게 오랜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도취와 비이성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예술가들에게 영감, 즉 작품에 관한 신비한 아이디어를 준다고 믿어졌지요. 실제로 약물이나 술과 함께 작업하는 예술가들도 줄곧 있어 왔고, 보통 생각하기에도 왠지 예술가란 일탈을 할 수 있는 인물들 같습니다. 죽여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영감을 찾아서 말입니다.


 예술적 아이디어도 분명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종교적인 황홀감이나 귀신이 내 옆에 있는 것 같다는 기분마저도 뇌의 화학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마당에(이런 '영적 감각' 은 측두엽이 담당합니다.) 영감은 과학의 힘을 빌어 얻을 수 없는 것일까요? 한 달에 두 알씩 캡슐로 포장된 영감을 구매하거나, 머리에 쓰면 영감을 상승시키는 헬멧이 개발되지는 않을까요?


 이번 회차에서는 그러나 영감, 뮤즈― 즉 일종의 예술적 고양 상태가 어떤 분자 구조를 띠고 있는지 찾아내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추상적이되 우리에게 가까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과학은 현대에서 널리 신봉되는 사고 체계입니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논리적>과 통하는 듯하고, 반대로 <비과학적> 이라고 하면 확실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과학적인 것은 믿을 수 있고 비과학적이면 미신입니다. 근거가 없다는 뜻이지요.


 과학적 방법은 역시 과학에 기반한, 근대 기술 문명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전 세계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학과 합리를 제일로 여기는 사상이 절정에 이르렀던 20세기, 하나의 반박이 등장합니다.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당시 미개하다고 여겨지던 원주민들의 사회를 연구하여 그들의 부족 체계와 사고 방식에 관한 깊은 통찰을 내놓습니다. 


 그는 단순 미신이라고만 생각되던 원주민들의 토테미즘(동식물이나 자연물을 각 집단의 토템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부족 내 사회 제도 및 종교 체계가 발달하는 형태)이 실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를 가지고 세상을 분석하는 하나의 틀인지 치밀하게 논증합니다. 동식물에 대한 원주민들의 분류는 당시 식물학 분류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세세하며 부족을 나누는 원리나 생활 규칙을 형성하는 원리도 그들만의 복잡하고 합당한 논리에 바탕한다고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돌 부적을 설명하는 삽화(Levi-strauss, La Pensée Sauvage)



 '야생의 사고' 라 불리는 원주민들의 사고 체계는 즉, 흔히 생각하는 '과학적 분석 방법' 과는 다르지만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유를 바탕하며, 과학적 방법과 반대에 있는 중요한 사고의 한 축이라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견해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은 그 동안 이어져 오던 학계의 서구 중심주의에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고, 또 현대 과학만이 세상을 보는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체계라는 시선에 반해서, 세상에는 다른 사고 체계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역사적으로 그래 왔다는 시사점을 제공했습니다.


 '야생의 사고' 는 돌아보면 과학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과 합리의 고장처럼 보이는 유럽이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부족 사회와 비슷한 면면들이 촌락에 많이 남아 있었지요. 마을마다 사용하는 머릿수건 모양이 다르고 수건 모양에 따라서 결혼 가능성이 정해지는 등의 모습은 토테미즘이 존재하는 원주민 사회 규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는 과학이 세상을 해석하는 단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학은 분자 단위까지 내려가 세상을 분석하며 우리에게 엄밀함을 제공합니다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많은 지식과 표현들은 과학이 그 정도까지 엄밀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울적해하는 친구에게 '산책을 좀 해 봐.' 라고 권할 때 우리는 산책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햇볕과 바람과 걷기가 생물학적으로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새로운 시각 신호를 받아들이는 일이(풍경을 보는 일이) 전기적으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밝히지 않아도 말이지요.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닐까요? 오히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쪽을 사랑이라고 믿고 싶어지지 않나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2001) 는 그 인트로 장면에서 로봇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설정을 전달하기 위해 로봇으로 하여금 '사랑' 을 동공 확장, 심박수 증가, 체온 변화 등으로 요약하는 대사를 삽입했습니다. 아마도 현대 과학은 사랑과 다른 많은 감정들에 대해 실질적으로 엄밀한, '과학적인' 해석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현대에도 살아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과학 아닌 해석이 여전히 인간에게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적인 문장은 불필요하지 않고, 비과학적인 서술은 과학적인 서술만큼이나 과학 외 세상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뇌 과학을 연구하는 한 박사님은 저에게 '자신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신비로운 부분, 이를테면 영혼 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고 하시더군요. 이는 과학의 부정이나 모순이 아닐 것입니다. 슬픔은 신경 화학 작용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깊은 가슴의 고통으로도 번역될 수 있으며, 위로하는 포옹 속에서 우리는 '영혼이 따뜻해진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디오니소스의 포도주가 정말로 신의 음료라서 술을 마신 사람들이 도취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술에 포함된 알코올 성분이 인간을 도취시킨다는 점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마시는 술의 흥이 사라지던가요? 


 예술의 영감, 뮤즈는 압생트 속에도 있으며 햇볕이 아름다운 날 강가를 따라 하는 산책에도 있다고 그래서 저는 믿고 싶습니다. 실험실 밖에서 춤추는 자유로운 뮤즈의 옷자락을 따라서 오늘은 걸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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