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참 행복했다. 하루 종일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밤이 되어 하루를 마무리하려니 다소 심장이 갑갑하였다. 너무 앉아서 강의만 판 것이 화근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글은 편하게 누워서 쓰고 있다.
나는 행복하고 웃음 짓는 일을 많이 만들고 싶다. 누군가를 험담하거나 배제하면서 결속력을 다지고 싶지 않다. 일상에서 잔잔한 즐거움을 많이 만들어나가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어렵기에 우리나라가 우울한 국가라고 하겠지?
내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은 별이 참 잘 보였다. 마치 알퐁스 도데의 <별>이라는 소설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저녁을 먹고 시원한 끈 원피스를 입고 동네 친구들과 집 앞마당에 앉아 돗자리를 깔고 별을 보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앞집 할머니는 많이 무서웠는데 호랑이 선생님 같은 정겨움이 있었다. 그런데 요새는 그런 정다움이 많이 옅어진 것 같다.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도 그립고 할아버지도 그리운데 친척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냉담한 태도가 많이 서린 것 같다. 서로에 대한 부러움과 질시,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즐겁고 행복한 일을 많이 만들어나갈까 고민이 된다. 선한 의도로 누군가를 돕고자 해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을 사기도 한다. 나의 진솔한 내면을 보여줘도 가식 아니냐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진실한 관계를 만들어나간다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오늘 뉴스기사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1인 가구가 많아지고 있으며 반려견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는 외신보도도 있었다. 우리 가족도 반려견을 키우고 많이 사랑하지만 이웃 간의 정이나 신뢰는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조금씩 웃음꽃을 피워나갈 수 있다. 홀로코스트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죽으러 가는 와중에도 게임인 척 연기하며 아들을 지켜주고자 했던 유머러스한 아버지처럼 말이다.
삶은 환희와 고통이 함께 뒤섞여있어 더 슬프고도 아름답게 반짝인다. 우울과 절망, 비관으로 점철된 인생 속에서도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친절을 베풀면 나의 인생도, 이웃도 더 많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이리도 아름다운 하늘 아래 살면서 어째서 사람들은 온갖 화를 내거나 변덕을 부리는 걸까? “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야> 속 소설의 한 구절이 마음을 뜨끔하게 한다. 서로 많이 사랑하며 배려하며 행복한 이웃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들 왜 이렇게 화가 많은가 싶을 정도로 표정이 험상궂은 사람도 많고 겪어보지도 않고 적대감을 표현하고 사람을 따돌리는 사람도 많지만 그들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 지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건 결국 사랑이라는 문학 속 명언처럼 서로를 많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인류는 사랑과 연민의 감정이 있어 계속 이어져왔다는 생각이 든다. 내 가슴속에 계속 사랑이 숨 쉬게 해야겠다.
가장 먼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싶다. 순수한 어린이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