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눈은 비취색이었어요. 길고 짙은 속눈썹에 파랗게 빛나는 눈은 한눈에 봐도 외국인의 느낌이 물씬 풍겼죠. 머리카락도 금발이었어요. 밀밭을 닮았다는 어린 왕자의 금발 머리칼처럼 말이에요. 바라만 봐도 가슴 설레는 외모를 지녔는데도 이 아이는 외톨이였어요. 같은 반 친구들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일까요. 그 이유는 이 아이도, 따돌리는 친구들도 몰라요. 그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을 뿐이에요.
아이의 아버지는 한국인이지만 어머니는 먼데 유럽에서 오셨다고 해요. 다문화가정이 많은 이 동네에서도 매우 드문 나라에서 왔어요. 어디라더라? 저도 처음 들은 나라라 듣고도 금방 잊어먹곤 했어요. 비행기 타고 아주 오래 날아왔다고 해요. 그게 벌써 4년 전이라고 하네요. 그런데도 늘 혼자인 그 아이는 얼마만큼의 울음을 참았던 걸까요? 아니 너무 오래 참아서인지 나중에는 너무나도 담담해 보이기까지 했어요. 가끔 친구들이 시비를 걸 때면 버럭 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저는 알아요. 그 아이의 본모습은 그게 아니란 것을.
그 아이와 내가 같은 점이 있다면 둘 다 혼자 노는 걸 좋아한다는 점,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한국인이고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그 아이는 다문화 아이이고 괴롭힘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 아이는 한국말이 완전히 익숙지 않았어요.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데 글자를 보면 2학년 수준이었어요. 다문화학생 중에는 한국말을 제법 빨리 익히는 친구들도 있는가 하면 외국에서 온 친구들 중에는 그렇지 못한 친구들도 있거든요. 아, 그런데 왜 과거형으로 말하느냐고요? 네. 그 아이는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갔어요. 지독하게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만을 보내다 못 견디고 돌아갔어요. 나라도 먼저 다가가 볼걸. 그런데 나도 그리 대담한 성격은 아니어서 그저 뒤에서 말없이 지켜만 봤네요. 그게 후회가 되었어요. 그렇게 나는 전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SNS와 게임, 독서를 즐기던 저는 그날도 어김없이 인스타그램 앱을 실행했어요. 그런데 추천 친구에 낯익은 이름이 보이는 거예요. ‘카렌’ 네! ‘카렌’이었어요.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간 ‘카렌’이었어요. 전 너무나 반가워서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죠. 저처럼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조금은 대범해지기도 하나 봐요. 하루를 망설이다가 다음날 메시지를 보냈어요.
『안녕, 카렌. 나 현지야. 기억나니?』
『현지? 늘 조용히 책을 익던 아이?』
『응. 맞아. 기억하는구나. 잘 지내고 있어?』
『뭐, 그럭저럭. 한국이 그립기도 헤.』
『그렇구나. 너랑 이야기를 많이 못 해서 아쉬웠어.』
『나도. 왠지 다가가기가 두려워써』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대화를 시작했다면 좋았을 텐데』
...
그렇게 우리는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았어요. 그리고 약속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의 일상을 나누기로. 그렇게 우리만의 비밀 편지 교환이 시작되었어요. 참, 그 아이는 리투아니아에서 왔다고 하네요.
<첫 번째 메일>
안녕, 현지야. 이곳은 비가 내리고 이써. 너가 먼저 메시지를 주어서 무척 기뻐써. 친구들은 마니 사겼냐고 물었찌? 한국에 있을 때보단 제법 마니 사겼다. 친구들이 나에게 계속 무러봐. 한국은 어떤 곳이었냐고. 그래서 내가 한국은 아주 멋찐 고시라고 이야기해주어써. 노픈 건물도 만코 사람들도 씩씩하고 친절한 곳. 다시 정말 가고 시픈 곳이라고 이야기해주니 모두들 가보고 십다고 하더라. 나한테 한국어도 가르쳐달래고 해써. 나 아직 한국어가 서툰데 너도 좀 도와줄꺼지? 그럼 답장 기다릴게!
카렌
<두 번째 메일>
안녕, 카렌! 너의 메일이 정말 기다려져. 두근두근한다. 나야 당연히 너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줄 수 있지. 네가 아직 완벽하게 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지고 있어. 너의 친구들도 한국에 대해 궁금해한다니 무척 반갑다. 내가 알기론 너는 한국 친구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 데 좋게 이야기해 주어서 고마워. 너의 친구들이 한국에 대해 좋게 생각하겠구나. 너의 편지를 읽고 나도 한국에 온 외국인이나 다문화가정 어린이에게 좀 더 상냥하고 적극적으로 다가가야겠다고 느꼈어. 내가 원체 소심해서 쉽진 않지만, 다르다고 놀리거나 괴롭히는 건 용납 못 해. 언젠가 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만 줄일게.
추신. 기뻐써 -> 기뻤어. 물었찌? -> 물었지?> 마니 -> 많이 무러봐 -> 물어봐 멋찐->멋진 고시라고->곳이라고 이야기해주어써->이야기해주었어 노픈->높은 만코->많고 시픈->싶은 십다->싶다 가르쳐달래고 해써-> 가르쳐달라고 했어 도와줄꺼지->도와줄거지 야. 카렌은 한국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데 받침을 글자 아래에 쓰고 맞춤법에 맞게 정확하게 쓰는 습관을 들여봐. 앞으로도 가르쳐줄게.
현지
나는 메일을 쓰면서 마음 한쪽이 쓰려왔어요. 분명 내가 기억하는 카렌은 미운털이 박혀서 늘 외톨이에 괴롭힘만 당했는데 이렇게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무척 의아하기도 하고 고맙게 느껴졌어요.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카렌은 좀 더 강인한 아이구나, 용감한 아이구나, 사랑이 많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카렌이 점점 더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우리들의 세 번째 메일을 교환했어요.
<세 번째 메일>
안녕, 현지! 나를 이해해주어서 고마워. 물론 나 상처 많이 받았어. 그런데 괜차나. 원래 아이들이란 제멋대로인 버이야. 우리는 어리자나. 언젠가는 날 괴롭힌 그 아이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깨다찌 아늘까. 그리고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닌 데 뭘. 은아, 현수, 소라처럼 조은 친구도 만아써. 친구들이 무척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전해줄래? 그리고 한국말 고쳐주어서 고마워!
-카렌
세 번째 메일까지 교환하니 카렌과 무척 친해진 기분이 들었어요. 이 기쁜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는데 오프라인에선 나는 여전히 혼자였어요. 카렌은 마음도 따듯하고 리투아니아에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있는데 나만 뒤처진 기분이 들었죠. 그래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저를 방과 후에 남겨서 말씀을 건네셨어요.
“현지야, 선생님이 볼 때 현지는 늘 혼자더구나. 친한 친구는 있니?”
“아니요. 저는 혼자가 편해요.”
선생님께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는 제 손을 잡았어요.
“혼자가 편한 사람은 없어. 사람은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법이야. 정말 아무도 친한 사람이 없니? 선생님이 도와줄게.”
선생님이 날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작년 선생님은 카렌과 나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선생님, 저 친구 있어요. 카렌 기억하시죠? 카렌이랑 계속 메일을 교환하고 있어요. 정말 좋은 친구예요.”
“카렌? 그 파란 눈에 금발 머리의 아이? 둘이 친했니? 잘 지낸다고 하던? 선생님도 무척 궁금하구나.”
“네. 카렌은 한국을 무척 그리워해요.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이 보고 싶대요. 그곳 친구들에게도 한국 자랑을 많이 한 것 같더라고요.”
“그럼 언제 한 번 카렌을 우리 학급에 초대 한번 해야겠다.”
“어떻게요?"
"온라인으로 초대하면 되지. 우리 수업하듯이 말이야.”
“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제가 메일로 카렌에게 초대장을 보낼게요.”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정말 신이 나서 하늘로 솟아오를 것만 같았어요.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카렌에게 메일을 썼죠. 선생님이 우리 학급에 카렌을 초대한다고 말이에요.
<네 번째 메일>
카렌. 답장이 좀 늦어서 미안해. 기막힌 소식이 있어. 카렌, 한국 친구들 보고 싶다고 했잖아. 선생님께서 카렌을 우리 학급 온라인 수업에 초대하겠대. 카렌 접속할 수 있지? 오랜만에 우리 얼굴 보면서 서로 안부 나누자. 정말 기대된다. 그럼 답장 줘. 너무 설레서 기다리기가 힘들어.
현지야. 나야말로 너의 메일을 밨고 무척 설레서 잠이 오지 않았어. 조용하고 소심한 모습만 아니라 발근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게 되어서 무척 기뻐! 그럼 그날 만나자! 그리고 다시 한번 한국어 가르쳐주어서 정말 고마워!
-카렌
담임 선생님께서는 메일로 카렌에게 온라인 화상 채팅 접속 주소를 보냈고 카렌은 우리 반 수업에 들어왔어요. 오랜만에 보는 카렌의 얼굴에 모두 가슴이 뭉클했는지 ‘와! 카렌이다’라는 환호와 함께 손뼉을 쳤어요. 카렌은 리투아니아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치고 기쁨으로 두둥실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카렌은 곱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리투아니아의 민요를 불렀어요. 우리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노래를 마치자 우리는 다시 한번 일제히 카렌에게 큰 박수를 보냈어요. 뒤이어 선생님은 나를 호명하셨고, 나는 반 친구들에게 카렌과 메일을 주고받은 이야기, 카렌이 한국 친구들을 무척 그리워했단 이야기를 전해주었어요. 그리고 잠잠이 듣고 있던 카렌도 우리들에게 말을 건넸죠!
“친구들아, 나는 너희들이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멋쩍어하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는 아이도 있는가 하면 무표정한 표정으로 덤덤히 바라보고 있는 친구도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다 이해할 것 같았어요. 아이들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구나. 카렌에게 고마워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에요. 우리를 미워할 수도 있었는데 전혀 그러지 않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카렌이 무척 고마웠어요. 저 또한 카렌을 통해 친구들과 한 발짝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죠. 마음 좋은 선생님도 무척 기쁘신 눈치였어요. 그날은 우리 반이 기억해야 할 역사적인 날로 남았어요.
-1년 뒤 여름방학-
은아, 현수, 소라, 윤지 그리고 나는 집 앞 패스트푸드점에서 카렌을 기다렸어요. 서로 중학교에서 새로 만난 친구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출입문에서 “얘들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카렌이었어요. 전보다 금발이 더욱 빛나는 것만 같았어요. 눈은 더욱 파래졌고요. 우리는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함박웃음을 보였어요. 한국말이 훨씬 는 카렌과 쉴 새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어요. 카렌은 다시 한국에 들어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