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8살인 하늘 양을 살해한 명재완 교사의 신상이 공개됐다. 처음 이 뉴스를 접하고 충격과 공포를 금치 못했다. 같은 초등교사로서 나를 따돌리고 폭력적이었던 동료 교사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좀 더 주도면밀하다는 점에서 이번 살해범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뉴스를 보면 명재완 교사는 가정불화와 학교에서 동료 교사들과의 불화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고 한다. 나도 힘든 시기가 있었고, 공격성을 보인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약자에게로 향했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문득 대학생 때 읽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이 떠올랐다. 그때 <악마와 미스프랭>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의 일화를 읽고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파울로 코엘료의 악마와 미스프랭 中...
"저게 무슨 그림인지 아십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들 중 하나죠."
... 중략...
" 저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큰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예수의 이미지를 통해 선을, 그리고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예수를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유다를 통해 악을 표현해야만 했던 거죠. 그는 작업을 멈추고 이상적인 모델들을 찾아 나섰어요.
합창 공연에 참석한 어느 날, 그는 한 합창단원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완벽한 이미지를 발견했죠. 그는 그 단원에게 자신의 아틀리에로 와 달라고 부탁했고, 그를 모델로 많은 습작과 스케치를 했어요.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 <최후의 만찬>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때까지도 유다의 모델을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한 추기경은 벽화를 빨리 끝내달라고 재촉하기 시작했죠.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화가는 드디어 누더기를 걸친 채 고주망태가 되어 도랑에 쓰러져 있는 조로(早老)한 젊은이를 찾아냈습니다. 크로키를 할 시간도 없어서 조수들을 시켜 그를 곧장 성당으로 데려갔죠.
성당에 도착하자마자 조수들이 젊은이를 일으켜 세워 모델이 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죠. 이렇게 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 얼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부도덕, 죄악, 이기심을 화폭에 옮겨놓을 수 있었던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작업을 끝냈을 때, 술기운에서 깨어나 눈을 뜬 거지가 눈부신 벽화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놀라움과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어!"
"언제?"
크게 놀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물었죠.
"삼 년 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기 전에. 난 한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고, 내 모든 꿈들을 하나씩 이루어나가고 있었소. 그때 어떤 화가의 부탁으로 이 그림의 예수를 그리는 데 모델이 되어주었죠."
유튜브의 댓글이나 스레드 같은 곳에 명재완 교사의 제자들이나 동료 교사였던 분들의 글을 보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좋은 교사였다, 안타깝다는 글도 보인다. 인터넷 글만으로는 진실을 확인할 순 없지만, 위의 소설 속 일화처럼, 한 사람에게는 ‘선’도 ‘악’도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동양의 사상가들이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등을 주장해 온 게 아닐까. 예전에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으며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고민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과 자라면서 여러 거친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성격과 가치관이 다르게 형성될 것이고 그것이 한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기에 너무 마음이 쓰라리고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지만, 범죄를 처벌 위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예방적인 부분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가 발생할 수 없는 촘촘한 시스템을 만들어서 고통받는 피해자도, 가해자가 발생하는 것도 방지하면 사회가 좀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노르웨이의 할덴 교도소 등 북유럽에서는 교도소도 호텔처럼 꾸미는 등 우리나라보다 훨씬 선진적인 부분도 많다고 한다. 처벌보다 교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실제로 재범률이 70%에서 20%로 내려갔다고 한다.(수형자가 겪는 고통 지나치면 교화보다 적개심 더 키울 우려)
그렇다고 가해자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지되,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명재완 교사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가정과의 불화, 학교 내에서의 불화가 생기고 우울증으로 처방받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된 걸까. 단순히 환경 탓인지, 아니면 개인의 성향 탓인지 판단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고 더 이상의 낭떠러지가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범행을 저지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내가 잃은 것이 아닌 그 과정에서도 내가 얻은 것을 생각해 봐야 절망적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모든 걸 다 잃었다는 절망감조차 나의 지나친 부정적 해석일지도 모른다. 류시화 시인의 <지구별 여행자>에서 한 인도인은 ”행복의 비밀은 당신이 무엇을 잃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얻었는가를 기억하는 데 있고. 당신이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훨씬 많다는 걸 기억하는 일이오."라고 말한다. 고통이란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살다 보면 많은 힘든 일이 닥칠 수 있다. 내 삶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사실은 그것마저 내 욕심이라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이 보일 수 있다. 그럼, 마음을 좀 더 편안하게 가질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별이 된 하늘 양이 부디 그곳에서는 마음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 사회가 좀 더 서로를 따스하게 대해주고 평화로운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학교에서부터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