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숲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숲을 보는 사람과 나무를 보는 사람. 내가 한국에서 만난 많은 모범생은 대체로 나무를 보는 유형이었다. 눈앞의 작은 요소에 집중하고, 세세한 것들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나는 작은 부분에만 매몰되기보다는 더 멀리 내다보고, 더 크고 넓은 꿈을 그리며 살아왔다. 마치 『갈매기의 꿈』 속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말이다.
학교에서 생활하다 보면 때때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다.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가려 노력하지만, 우리 반을 지도해 주시는 다른 강사나 선생님들께서 조언을 주실 때 마음이 복잡해지곤 한다.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모범적인 학생’은 대개 수업 시간에 조용하고, 시키는 일을 신속히 수행하며, 단순 암기를 잘 해내는 아이들이다. 물론 그런 태도도 분명 귀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학생들을 바라본다. 말수가 많거나, 때때로 반대 의견을 내거나, 암기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깊이 고민하고 끈기 있게 생각하며 노력하는 아이들에게서 성장의 가능성을 본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며 수업을 만들어 간다.
많은 학교는 ‘질서정연함’과 ‘조용함’을 이상적인 교육의 모습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린이란 존재 자체가 생기 있고 활기찬 존재가 아닐까? 어른들은 식사 중에도 이야기꽃을 피우며 교감하는 반면, 아이들에게는 숨소리조차 조심하라는 분위기를 강요하는 건 어딘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전통적인 학교의 분위기와는 다른,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삐삐라는 인물을 통해 어린이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 역시 그 모습에 깊이 공감한다.
초등학생들은 군사훈련을 받는 병사도, 직업훈련을 받는 노동자도 아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살아가며, 일상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축제처럼 만들어 가는 작고 놀라운 존재들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서 공부도 하고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학생으로서의 훌륭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 아이가 부족한 존재라는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를 낮추거나 얕보지 말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자고 강조하셨다. 그렇기에 어린이를 만나는 교육자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은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 나는 그런 마음으로 어린이 곁에 서는 교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