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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Feb 28. 2023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읽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명동성당에서 6개월간 교리공부를 받은 후, 교적을 옮겨 덕정성당에서 2016년 3월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수녀님이 정해주신 ‘라파엘라.’ 일곱 명의 대천사 중 한 명으로 의사, 여행자, 시각장애인의 수호천사이며, 라파엘라는 하느님의 치유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나에게 그러한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라파엘라 대천사의 수호를 받으며 많이 치유받고 성장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를 명동성당으로 이끈 것도 하느님의 손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5년의 마지막날, 나는 명동성당에서 송년미사에 참석했다. 신부님은 처음으로 사제들에 관한 영화가 나왔다며 <검은 사제들>에 관한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수녀님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질문을 하셨다. 아마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게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작은 소리로 ‘생명’이라고 답했다. 폐인처럼 살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성당으로 향한 나에겐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게 소중했다. 수녀님은 ‘하루’라고 답하셨다.


 그렇게 성당을 계속해서 다니고 교리공부도 마친 , 가족과 친구의 축하 속에 세례를 받았지만, 원래 무교집안인 나는 미사에 제대로 참석하지도 않고, 다시 성당에서 멀어졌다. 믿음은 강하다고 자부하지만, 외부에서   교만으로밖에 보이지 않을게 뻔하며 나는 여러 형식적인 의례들이 귀찮고 싫었다. 그보다는 성경  인물들이 살아온 방식과 그들이 했던 말씀의 의미를 곱씹는   좋았다. 신부님의 론을 들으며 나와 일치하는 생각들을 공고히 하고 수용할  없는 것은 부정했던  같다. 그마저도 재미가 없으면 듣는  마는  하며...


 이런 내가 너무 싫었다. 나를 살린,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가까이하지 않고 세상사에 빠져 사는 내가 너무 싫었다. 어디 가서 천주교 신자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 나는 냉담자였으니깐... 타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은 천주교라 좋았지만, 가끔, 내게 형식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요하거나 보수적인 압력을 가하는 신도분들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계속해서 멀어져 왔다. 마음속 신에 대한 불꽃이 계속해서 사그라들었다.


 그래서 가톨릭출판사의 북클럽 1기 활동을 신청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더없이 좋을 기회라고 생각됐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었다. 과학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신은 만들어졌다며 과격한 주장을 펼치는데, 나는 인간이란 피조물을 만든 신을 알고 싶었다. 어쩌면, 이조차도 오만일지 모르겠으나...


 첫 번째 책,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핍박받고 오해와 멸시 속에 죽어간 예수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탄생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사실, 나도 예수님처럼 뜻하지 않게 많은 몰이해와 배척과 사람들의 차별과 혐오 속에 고통받아왔기에 예수님의 일대기에 눈물이 나고 슬프고 또 어떤 땐 부끄러웠다. 예수님에게 공감한다는 것 자체가 과대망상처럼 느껴졌다. 예수님의 고통이 누군가에겐 죄를 용서받고 치유가 되는 일이듯, 나에게도 그러했다.


 예수님은 비록 많은 차별과 오해 속에 고통받았지만, 다시 살아나 베드로 등 많은 제자들과 바오로에게 많은 씨앗의 신앙을 심았단 것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그들은 유대교의 율법이냐, 아니면 예수가 가르치고자 했던 사랑이냐를 두고 대립했지만, 결국엔 사랑의 힘으로 기운 것을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참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들에까지 손을 내민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그를 아들로 보내 타락한 자들의 죄를 대신해 희생양으로 바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내가 한 저녁 미사에서 신부님에게 들었던 말씀, 나를 핍박한 자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은 더 큰 의미에서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리라. 나를 미워하고 오해하고 거절했던 사람들과 화해하고 우정을 새롭게 다지고 싶다. 예수님이 몰이해의 고통 속에 오해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어쩌면 나도 단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기에 오해가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금 씩씩하게 일어나야겠다. 이사야서에 쓰인 말씀처럼.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비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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