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멘터리 K 교육격차 <현수는 행복할 수 있을까>를 보고
그동안 교사생활을 하면서 각양각색의 아이들을 만나왔다. 그중에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아이, 유난히 자주 우는 아이 등 마음이 아픈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반에도 어김없이 그런 학생이 있다. 오늘도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면서 꾀병인지 모를 우는 소리를 했다. 큰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서럽게 우는 통에 큰일이라도 난 건 아닌가 싶어 겁이 났다. 하지만 결국엔 또다시 마음의 문제였다는 게 밝혀지고야 말았다. 잠깐의 순간만 넘기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 쌩쌩, 신나게 노는 아이다.
뭐가 문제일까 머리가 아프고 고민이 되어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EBS다큐멘터리 K의 교육격차 4부를 이어서 봤다. <현수는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영상. 학급마다 현수라는 아이가 있지라며 공감하며 영상을 봤다. 여기서 현수는 교육격차로 인해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아이를 대표하는 은유다. 그래서 고립된 섬이 되고 마는 아이. 관조적으로 봤던 나는 어느새 영상에 몰입하며 내가 바로 현수였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오고 슬퍼졌다. 이유도 모른 채 사람들한테 조리돌림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지난날. 그래서 자살결심까지 하게 만들었던 과거의 시련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왜 그렇게 괴롭힘의 대상이 됐는지, 왜 고등학생 때까지 무난하게 생활해 온 내가 한순간에 고통의 시간과 마주해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깨달았다. 한국사회가 지나친 경쟁사회구나, 난 그러한 경쟁사회에서 낙오자로 낙인찍힌 거였구나. 내 진짜 실력과 상관없이 단순히 출발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정없이 편견과 차별의 그늘에서 싹도 틔워보지 못한 채 짓밟혔다. 그렇게 기나긴 암흑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영상에서는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 사회의 경쟁 자체가 공정한 게임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기 위해 운동장에서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는 놀이 활동을 준비해 주셨다.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생생하게 사람마다 타고난 운, 능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교육을 하는 선생님이 계시는 구나란 생각에 반가운 한편, 덜컥 걱정도 됐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교육관이 다르니깐 경쟁의 불평등, 공정함의 역설에 대해서 논하고자 하면 누군가는 능력주의를 들어서 사정없이 비판을 하고 반대할 게 불 보듯 뻔하니깐.
그래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바로 전 영상인 3부 <인서울이 뭐길래>를 보고는 아무 글도 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서울에 몰려있는 건 사실이니깐 말이다. 나부터가 주말마다 서울에 가는 입장으로서 인서울 과열현상을 비판할 수도 없고 잠재울 수 있는 묘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 뉴스에서는 중간고사에 기출문제가 출제되어 교사가 징계를 받고 감사에 착수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런 현실이 너무나 가슴이 갑갑하고 숨 막히게 만든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에서 한스가 자살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 전통과 권위적인 학교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도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교사인 나부터가 학교에서 고충이 많다. 사회 자체가 정글이고 경쟁 그 자체다. 그 속에서 아등바등 누군가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 더 많은 스펙을 쌓아 올리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해 간다 한들 아슬아슬한 젠가처럼 쌓아 올린 우리의 인생이 어느 한 블록만 빼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가슴 졸이며 말이다. 내가 원하는 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경쟁 자체를 없애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급진적인 생각일까? 현수뿐만 아니라 나 또한 쉽게 무너지지 않는 행복에 가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