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선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비 Sep 14. 2023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의 여행

박하경 여행기 <6화>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의 여행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다면   





<스포일러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아침, 부장 선생님의 긴급한 호출. 하경은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장면을 본 순간, 1년 차 때 연가를 쓰고 일본 여행을 갔던 때의 갑갑함이 떠올랐다. 난 분명 정식으로 연가로 복무를 올리고 엄연히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왜 자꾸 전화하는 건지... 하경도 분명 토요일인데 계속해서 학교에서 전화가 온다. 부장에 이어 학부모회장 전화, 단톡방 호출, 학생회장까지 차례로. 이런 게 바로 교사의 고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하경은 다시 또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이번엔 멀리 떠나지 않았다. 바로 서울 근교. 경희궁과 국립기상박물관으로.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어서 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처럼 비 오는 날 가면 정말 제격일 거란 생각이 든다.      


안 가본 길로 가보자.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모험은 가능하다.     


 나도 가끔은 피치 못할 이유로, 때로는 그러고 싶어서란 이유 등으로 동네에서 안 가본 길로 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정말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들어서 공감이 간다. 얼마 전에는 동생과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자주 다니던 길과 반대로 한참을 걸었는데 새로운 골목과 맛집들이 눈에 띄어서 무척 신났었다. 시간 날 때 오기를 기약하며.     


 하경은 학교 생각을 벗어던지고 쉬어보고 싶지만 계속해서 전화가 온다.     


어떻게 됐어요? 게임 그만두기로 했나요?
이야기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아니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요?     


 정말 화딱지가 난다. 교사는 학부모 비위도 맞춰야 하고 학생들 마음의 소리도 들어줘야 하고 나라는 영혼을 내려놓고 오로지 타인의 기준대로 살아야만 그나마 조금 욕을 덜 먹을 수 있는 존재란 생각을 했었다. 이게 바로 다 교사의 권위, 교육의 전문성이 무시받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데 길게 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당장 자신들의 입맛에 달짝지근한 과실을 안겨주어야만 좋아한다.     


 스트레스를 뒤로하고 기상청박물관에서 잠시 쉬고 있는 하경은 같은 학교 미술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다. 주말에도 학생들과 프로젝트 수업을 나온, 월요병 없는 미술 선생님의 모습에 감탄하며.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둘. 미술 선생님은 하경에게 주말에 뭐하는지 묻는다.     


여행 갔다 와요. 아무 데도 안 가면 못 견딜 것 같고 동시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서요.
근데 저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거 하고 싶어요. 
하면 되죠?
제가 그걸 잘 못 해요.     

 정말 말만 들어도 너무나 편안해지는 대사다. 내가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기도 하다.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를 보는 것은 내게 아무것도 안 한다와 동의어다. 드라마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이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너무 편안하고 소박한 느낌에 행복하다. 내일이 금요일이란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내일도 퇴근 후,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7화를 보고 아무것도 안 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지! 후후  

   

미술 선생님은 또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애들도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애들 이해하는 거 하나는 자신 있었거든요. 요즘에는 세상이 빨리빨리 변하다 보니깐. 쟤들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쟤들이 사는 세상에 맞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고.
아주 기만적이죠.
잘하고 계시잖아요.     


 밀레니얼 세대를 넘어 Z세대, 알파세대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데 내가 배웠던, 경험했던 것들이 요즘 세대에게 얼마나 유용하겠느냐, 와닿겠느냐는 걱정이 앞설 때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하는 대로 아무것도 안 하며 살기가 힘들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시대를 따라잡기 위해 계속해서 배우고 경험하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탁 놓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옛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을 경멸조로 비하하는 용어도 쓰이는 세상에서 추억이나 아날로그나 느림을 추구하면 답답하게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처럼 조금 한 템포 쉬어가며 천천히 여유롭게 세상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이 드라마 극본을 써주신 손미 작가님께 매우 감사드린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작가님처럼 여유롭고 관조적인 태도로, 아무것도 안 하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세상에 위로가 되는 것들을 내놓고 싶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