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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Dec 08. 2023

진짜와 가짜 구별하기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까? 정말로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짓으로 선을 꾸미는 ‘위선자’도 있다.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지만 ‘위선자’와 함께 있으면 어딘가 불편하고 미심쩍은 마음을 거두기 힘들다. 그런데 세상이 혼탁하고 혼란스러우면 서로가 서로를 겨냥해 ‘나쁜 사람’이라고 하니 진실을 가리기도 힘들고 사람들 사이에 불신과 반목만 심해질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위선자’는 본인이 위선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은 참말로 ‘선한 사람’인데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저 사람이 ‘악’이고 ‘위선자’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둘 사이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어떤 한 사람을 지목해 선동하면 그대로 믿어버린다. 그렇게 왕따가 시작되고 혐오와 배척, 차별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때로는 불편하게 만드는 점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해서, 피해를 줘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질투심과 열등감을 유발해서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질투심으로 가득하였다는 것을 은연중에 억압해 버리고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해서 자기의 미움과 분노를 정당화해 버린다. 제3자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거짓 선동에 속아 넘어가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낙인찍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자와 함께 가해자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대표적인 이야기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가 있다. 오셀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간교한 이아고의 계략에 말려들어 부정을 저질렀다고 의심하고 살해한다. 아름다운 데스데모나에 대한 사랑과 열등감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아고가 데스데모나에 씌운 누명을 믿게 만들어버렸다. 이야기에서는 독자는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내게 닥친 일이라면, 오셀로와 다르게 현명하게 처신할 수 있을까? 오셀로처럼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이아고 같은 악인을 만나게 됐을 때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때로는 그 자체로 선한 사람을 악마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업적, 선한 행위, 아름다운 완벽함 등이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질투 나는 상대를 사탄이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고 자신의 내면에 얽혀있는 증오와 더러움 등이 해소될 수 있을 것만 같기에 그리 악독하게 구는 것이다. 그럴수록 세상은 더 어지러워지고 혼탁해지고 진실과 거짓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악이 선을 짓밟고 승리하는 세상이 오는 것일까?     


오늘 점심시간에 우리 반 아이가 친구에게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거짓말을 더 많이 해.”라고 했다. 옆에서 다른 아이가 “선생님, 의문의 1패.”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지만, 밥을 먹다 문득 생각에 잠겨 들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보는 어른이란 어떤 존재일까? 하고 말이다. 정말로 믿을 만한 어른이란 어떤 사람일까? 마구 엉킨 실타래처럼 모든 것이 사실은 뒤바뀐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비결은 무엇일까? 사람의 본성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난다고 하는데 매번 위험한 상황을 조성할 수도 없고 말이다. 정신과의사 선생님은 나쁜 사람은 당해 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우리가 당하고 나서야 나쁜 사람이라고 안다고 말씀하셨다. 참 난감하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타인에게 친절하라. 그는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라는 속담이 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처럼 결국 우리는 순간마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선행을 베풀고 사랑을 실천하면 결국 진짜와 가짜의 구분도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유럽 여행 시 소매치기도 당하고, 릭샤 사기도 당하고, 수상한 남자가 쫓아오기도 했었다. 로마에서 길을 잃어 밤 12시에 골목길을 걸어갈 때는 정말 무서워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두렵고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그럴수록 더 담담하게 의연하게 대처했다. 무엇보다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은 운칠기삼처럼... 


사실, 결국 남을 의심하는 사람은 어쩌면 그만큼 자기 불신으로 가득한 사람일지도 모르고, 타인을 쉽게 믿는 사람은 순진할 만큼 내면이 선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인 우리가 어떤 일이 닥치기도 전에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기보다 그저 하느님을 믿고 매 순간 다른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다 보면 결국엔 곁엔 좋은 사람만 남게 되지 않을까... 나의 안전을 지키면서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기르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다. 내가 좋은 사람인데 나쁜 사람이 다가온다면 결국 영혼의 주파수가 달라서 멀어지게 되어 있다.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처럼 사랑의 행동이 결국 평화의 행동인 것이다.

Works of love are Works of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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