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비 Jan 27. 2024

작은 구멍 사이로

창작시

작은 구멍 사이로



어느 날 한 없이 추락한 나는

작은 구멍으로 숨었어요

오래도록 가쁜 숨을 참으며

소리 없는 적막 속에 나를 가두었어요


안전하니깐요

나를 짓누르는 가시 돋친 말

공포에 전율하는 살기 어린 눈빛,

매섭고 차가운 손자국은

피할 수 있으니깐요


그 안에서 나는 피를 쏟았어요

울음과 분노와 한이 섞인

시뻘건 피를 쏟았어요

끔찍한 손가락들이 계속 뻗어 나와

내 안에서 커다란 고목나무가 되었어요

까마귀와 하이에나가 가끔 쉬었다가는 곳


그렇게 나는 움푹 파이고

저주받고 푹푹 쓰러지고

가지를 모두 떨구었는데

작은 구멍 사이로 빛이 보였어요

그것은 머나먼 꿈으로 향하는 일곱 빛깔 무지개

나를 인도하는 천국의 계단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나에게

구원의 두레박이 내려왔어요

나의 숨을 길어 올리는 아름다운 손길

더 이상 울음을 참지 않아도 되는 환희


그렇게 나 무지개를 보았어요

이제 나에게 까마귀와 하이에나는 찾아오지 않아요

내 곁엔 푸른 이파리가 춤을 추며

천사와 무지개와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찾아왔어요

더 이상 고목나무가 아니라 희망을 품은 생명수가 되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연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