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비 May 08. 2024

삶의 축복을 누리는 법

공지영 산문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읽고

“그저 어제처럼 사는 것, 내게 젊은이들보다 알량한 권력이 약간 있어, 어제처럼 살아도 나는 불편하지 않고 나만 불편하지 않은 것, 이것이 늙음이다. 죽음보다 못한 늙음을 우리는 흔하게도 본다.”  P.73    
 
“이렇게 된 건 나이가 내게 준 것이 결코 아니야. 나이를 먹고 가만히 있으면 그저 퇴보할 뿐이야. 더 딱딱해지고 더 완고해지고 더 편협해지지. 자기가 바보가 된 줄도 모르는 바보가 되지.  만일 내게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면이 있다면 그건 성숙해지고자, 더 나아지고자 흘린 피눈물이 내게 준거야.” P.78    



 

공지영 작가는 자신의 지인이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소식을 접하고 이스라엘을 다녀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여행하면서 그는 모세는 왜 광야에서 그토록 헤매야만 했을까?라고 의문을 갖는다. 성경 지식이 많지 않아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공지영 작가는 늙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저 나이 먹는 것에 만족하며 새로움을 향한 열정, 열린 자세, 성숙해지려는 자세가 없다면 죽음보다 못한 늙음일 뿐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하고 열흘길이 40년이 된 이유와 일맥상통하다는 점에서 비롯된 사유인 것 같다.     


아직 서른몇 해 정도 살아본 나로서는 삶이란 게 점점 더 기대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 공부도 더 깊이 파고들고 싶고 여행도 더 많이 다니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요즘 실천하는 것으로는 조금씩 인테리어도 바꾸고 있다. (아직 정리 중이라 집이 난장판...)  요리도 글쓰기도 음악도 배우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데 하루는 왜 이리 짧은지....


가끔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 나이에 뭘 배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예전에는 수명이 짧아서 환갑잔치를 기념하고 성대하게 치렀다지만, 요새는 칠순에도 정정한 어른들이 많다. 나는 우리 엄마아빠가 정말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수영을 잘하시고 아빠는 낚시를 좋아하신다. 책을 좋아하는 나하고는 정반대이지만, 취미가 있는 건 참 멋져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세대는 결국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광야에서 죽고 말았지만 신세대는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육체의 늙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젊음, 하느님에 대한 순종, 믿음이 더 중요한 것이다. 사우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청춘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강인한 육신을 뜻하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과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참신함을 뜻하나니     


생활을 위한 소심성을 초월하는 용기

안이함에의 집착을 초월하는 모험심

청춘이란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의 청년보다 예순 살의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우리는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어가나니     

세월은 살결에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을 상실할 때 영혼은 주름지고

근심, 두려움, 자신감 상실은 기백을 죽이고, 정신을 타락시키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는 경이로움에의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미래에의 탐구심과,

인생이라는 게임에 대한 즐거움이 있는 법          

그대의 가슴, 나의 가슴 한가운데에는 이심전심의 무선국이 있어     

인간과 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네

아름다움과 희망과 기쁨과 용기와 힘의 메시지를

그대가 젊어 있는 한     


그대가 기개를 잃고 정신이 냉소주의의 눈과 비관주의의 얼음으로 덮일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이네

그러나 그대의 기개가 낙관주의의 파도를 잡고 있는 한

그대는 여든 살로도 청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네 

     

나는 이 시를 대학생 때 처음 접했는데 늘 이 시가 전해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처럼 살고 싶다. 가끔 이 시의 구절처럼 나보다 더 젊고 어린 사람이 마음은 더 늙은 것 같으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공지영 작가는 책에서 자신이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자신이 알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깨닫고 자신의 무지와 편견에 큰 자책을 했다고 한다. 일견 공감이 가면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안다는 게 쉬운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명백백한 오답이 있으면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은 아니라고 확실히 지울 수 있는데 애매할 때는 참 어렵고 난감한 것 같다. 보통 그런 혼란스러운 시기를 오래 겪다가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 그럴 땐, 그 사람이 마음이 젊은 지를 보면 될 것 같다. 열린 자세, 관대함, 포용력을 지니면서도 냉철한 지성을 갖추었을 때, 왠지 그 사람은 믿을 수 있는 것 같다. 타인에게는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한, 따뜻한 마음과 날카로운 이성이 조화를 이룰 때, 그는 정말 멋진 사람이 아닐까? 그러한 사람을 알아보는 건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삶의 축복을 누린다는 것은 결국 삶을 지혜롭게 살다 간다는 뜻이다. 믿어야 할 사람과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믿음에 순종하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삶. 그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본명 하느님이 축복을 내려주실 거라고 믿는다. 늘 겸허한 자세로 나를 되돌아보며 살아야겠다.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오십이 되어도 늘 젊은 마음을 잃지 말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이날 아이들과 이 동화 어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