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능력
2014년 12월, 방송국 인턴 기자로 일을 한지도 4개월을 넘겼을 때였다. 다른 인턴들보다 1만원 높은 일당이 나를 뛰게 하였고 내 고개를 더 빳빳하게 했다. 쉴틈 없이 일을 하고는 집에 가서 번데기 처럼 담요에 쌓여 예능을 보다가도 미래에 이러한 일을 하고 있을 내 기쁜 모습을 상상했다. 크리스마스날 회사를 쉰 것이 배움을 놓친거라 생각할 정도로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인턴생활을 하고 있었고 2014년 12월 28일 일요일에 자진 출근을 했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 겨울 날씨에 만족하며 일요일인 탓에 유난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보도국으로 들어갔다. 사회부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미뤄두었던 기획 기사들과 연말 소식들을 전할 예정이었다. 오늘 메인 뉴스에 나갈 아이템들을 보고 타사 기사를 점검한 후 제보전화가 들어오는 책상에 앉았다. 대형 사기를 당했다는 제보자의 이야기를 15분 가량 들으며 애써 관심 있는 척을 해야했지만 제보자 또한 방송국에서 보도를 해줄것이라는 희망이 많이 없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으니 나의 이름을 부르며 간단한 업무들을 요청하는 기자 선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업무를 보며 왠지 오늘 같은 일요일 점심엔 바지락 칼국수가 제격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여유롭게 화장을 고치고 보도국으로 들어오니 타사 뉴스채널을 틀어놓은 모니터들이 모두 빨간 띠를 두른 속보기사를 띄워두고 있었다.
에어아시아기 추락 추정, 말레이시아 올해만 3번째 항공사고
바지락 칼국수는 무슨, 일 폭탄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싱가폴로 향하던 항공기가 추락했고 실종에다가 전원 사망 추정이라니.. 한국인 탑승객이 있었는지부터 알아야할 노릇이었다. 흔한 워커홀릭인 우리 캡이 팩스로 받은 에어아시아 Q8501편 탑승객 명단을 나에게 건내주었다. 이런건 어디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얻어내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200명도 안되는 탑승객들의 성(姓)을 확인하니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탑승객은 10명도 채 안된다. 나머지 이름까지 확인하고 보니 나란히 붙어있는 세개의 이름이 한국인이 분명하여 노란색 형광팬으로 줄을 긋고 보니 가족처럼 보였다.아빠, 성이 다른 엄마, 그리고 아이. 빨간 띠를 두른 속보 기사는 곧 "한국인 탑승객 3명 추정, 에어아시아 Q8501편 실종"으로 바뀌었다.
그 한국인 가족은 왜 인도네시아에서 싱가폴로 향하고 있었는지, 지인들의 증언과 안타까운 사연 등이 필요했다. 식상한 보도 패턴이라해도 할 수 없다. 누가 먼저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는지가 광건이기 때문이다. 인력이 부족한 일요일에 국제 소식이라 모든 언론사가 같은 출발점에 있는 듯 했다. 인도네시아 또는 싱가폴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한인회에 전화를 돌려야 할텐데..라며 검색을 하려던 찰나, 저런. 타사에서 그 가족 중 부모가 선교사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차라리 잘 됬다. 인도네시아 한인 교회들로 망이 좁혀졌고 검색을 해보니 교회만 열개가 넘는다. 한숨을 쉬고 가장 위에 적혀있는 교회부터 다이얼을 돌릴까 하다가 어쩌면 내 감을 믿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느낌이 좋던 교회, 부재중이었다. 그 다음 교회는 꼬마 아이가 전화를 받아 놓고는 어른이 안계시다고 했다. 세번 째 시도에 제발 누구라도 이 실종자들을 알고 있길..했는데 전화를 받으신 목사님이 지인이었다. 부부 중 여자 분이 혼자 선교활동을 하실 때 도움을 주셨다고 하고는 부부를 더 잘 알고 계신 목사님 번호를 선뜻 내어 주셨다.
환희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선교사 부부는 한국에서 혼인하고 인도네시아로 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아이는 돌이 채 안되었다고 한다. 비자 문제 때문에 싱가폴로 향하던 중이었다고 했고 부부의 부모님들이 아기의 돌잔치를 위해 다음 달 인도네시아 방문 예정이셨다고 했다. 나는 녹취록과 인터뷰 내용을 메모로 작성해 건너편에 앉아계신 선배에게 보냈다. 그러고는 지금쯤 연락을 받았을 부부의 양가 부모님들을 수소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다가 다음 지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내 일은 여기까지. 잘 해냈다고 생각했고 한숨을 돌리고 긴장한 탓에 경직된 어깨를 풀고 있었다.
그때였다. 보고를 넘겨 받은 선배가 내쪽을 향해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너무 슬프잖아.
누군가 내 뒷통수를 후려친 느낌이었다. 실제로 뒷목덜미가 아려왔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불과 5분 전에 직접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새롭게 들렸다. 슬픈 이야기었다. 선한 목적으로 인도네시아까지 가서 가정을 꾸린 착한 부부의 이야기. 새 새명의 기쁨과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가족의 이야기. 귀한 자식과 손주를 타지에서 잃은 부모들의 이야기.
그들의 "일"은 나의 "일"이었다. 업무. 테스크. 스스로의 성취감을 위한 것. 회사의 이득을 위한 것.
인정 받기 위해 나는 지금 쯤 오열하고 있을 부부의 부모님께 연락해서 취조하려고 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특종 기삿거리였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대한민국 기자들이 '기레기'라는 별명으로 불려야 하고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 나라 언론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으며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열심히 진실을 쫓는 기자들 마저 욕을 먹는다는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내가 언론인이 되고 싶은 이유, 면접때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나의 초심이 이제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기분이었다. 내 오만함..그게 문제였다.
나는 항상 버릇처럼 "타인을 100%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라고 했었다. 그래서 엄마가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렴.." 이라고 타이를 때마다 입장을 상상해 볼 수는 있겠지만 이해할 수는 없고 100% 공감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내 뒷통수에 상처가 난 그 날 비로소 내가 "공감"이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감이란, 머리속의 이해를 뛰어넘어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함께 머물러 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선입견이 없는 곳에서 시작할 때 공감 능력은 상승한다. 또한 언론인에게 공감이란, 타인의 "일"을 마치 나의 "일" 처럼, 우리의 "일"로 여겨 경청을 통해 동감하는 것이다.
몇개월이 지난 지금도 뒷통수의 쓰라림과, 그 날 보도국의 공기, 슬픔을 담고 있던 기자 선배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달라져 있었고 나는 바로 그 날, 4개월 반이라는 시간동안 인턴으로서 배워야했을 전부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