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에 관하여

- 그냥 아무 말 대잔치-

by 틈과경계

혐오는 야만의 시대 나를 지키기 위한 원초적인 감정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내가 오염될까봐, 내가 큰 해를 당할까봐 즉각적으로 인지된 초감각적인 인체 시스템이 만들어낸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나를 지키기 위한 이 생물학적인 반응에서 출발한 감정은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역사는 이 혐오라는 감정을 기준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를 해하는 외집단에 대한 혐오가 그 출발점이다. 원시헬스케어시스템으로 작동했던 혐오는 이제 내 집단에게 위해를 가하는 외집단을 향하는 사회적 감정으로 변화한다. 내가 속한 집단을 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누군가에게 투사된다.

여기까지는 혐오가 나를 지키기 위한 생존의 센서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내 신체, 내 집단에게 위해가 되는 그 무엇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커지면서 내 집단 내에서도 갈등이 발생한다. 집단을 유지하고 통제하기 위해 혐오는 정교하게 진화하기 시작한다. 아직 과학기술이 동트기 전, 신화적 공동체에서 질병이나 재난은 납득할 만한 원인을 필요로 했다.

공동체를 진정시키고 심리적 안도감을 주기 위해 혐오는 내 집단에 대한 강력한 공감과 사랑으로 거듭난다. 내가 속한 공동체 혹은 집단의 주류가 아니 집단의 우두머리가 인정하는 편에 속하기 위한 생존의 감정은 누군가를 혐오하게 만든다. 다 누구 때문이다, 이건 누구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일이다 등 집단 내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과 분노는 특정한 사람이나 소수 집단을 향하게 된다.

혐오를 법 철학적으로 다룬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는 원초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으로 부패, 오염, 동물성과 관련된 대상이나 행위에 대한 강한 반감로 연결된다고 했다. 자신과 '타자' 사이에 경계를 긋고 타자를 비인간화하려는 욕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말한다. 대상의 실제 해악보다는 상징적인 오염이나 경계 침범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하게 된다고 말이다. 혐오스러운 대상에 우리 자신의 동물성이나 죽음에 대한 불안을 투사하며, 이를 나를 정화하고 우월감을 느끼게 되는 셈이다.

혐오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집단(여성, 동성애자, 특정 인종 또는 카스트 등)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기제로 작동해 왔다. 특정 집단을 '더럽다', '부자연스럽다'라고 낙인찍음으로써 사회적 배제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는 주관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실제적인 해악보다는 감정적인 반감에 기초한다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혐오스럽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행위나 집단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부당한 차별로 이어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2025년 대한민국은 혐오 공화국처럼 보인다. 초고속을 성장을 거듭하게 만든 출세지향주의, 능력주의가 사회의 공고한 헤게모니를 형성하면서 어린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내 생존을 위한 자구책으로 불안과 위기, 분노의 감정을 분출할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나를 지키기 위한 감정이자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감정처럼 혐오가 작동한다.

호모 사피엔스 뇌에 작동하는 이 원초적 본능의 감정이 사회적으로 투사되는 현상은 너무도 많다. 다음 호 글에서는 대한민국의 혐오를 대표하는 몇몇 사례 혹은 사건에 대해 말해볼까 싶다. 마음이 바뀌면 다시 아무말 대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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