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틈과 경계

젖은 햇살

이현승 시인이 쓰다

by 틈과경계


젖은 햇살

이현승


동주, 그대는 겨울 햇살 한 줌이다.
행인의 정수리를 노리는 여름 한낮의 볕이 아니라
고개 숙이고 걷는 사람의 등을 두드리는 겨울 햇볕이다.

그 빛은 가장 낮고 구석진 곳까지 들어와
아무리 작은 티끌에게라도 긴 그림자를 매달아 준다.
그리고 그 빛은 아주 잠시만 머문다.

추운 날 바람벽에 등을 대고
한 줌 햇살에 손을 비비는 사람은
볕을 들이는 사람, 불을 피우는 사람이다.

석양 속에서 노랗게 익은 얼굴들처럼
이 세상은 슬픔 속에서 젖어 빛난다.
시가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안 된다. 슬픔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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