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목사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영화 <에브리씽 에므리웨어 올 앳 원스>
내 아버지는 선비의 내면을 간직한 채 목사로 살았다. 손에는 성경에 들려 있었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유학자의 풍모가 서려 있었다. 목사가 다 내 아버지 같은 줄만 알았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내 아버지는 아주 예외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버지 직업은 내 삶을 옥죄었다.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나는 그의 세계관에 머물러야 했으며,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수록 늪에 빠져든 것처럼 더 깊이 허둥거리며 살아야 했다. 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그 발버둥으로 살아온 것 같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내면서 종교적 의례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었다. 바이러스의 숙주인 사람을 혐오하는 세상을 겪으며 오히려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의 세계는 이제 나와는 다른 세계다. 그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거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아버지는 평생을 철저히 사회주의자로 살았지만, 내면화된 전근대적 욕망도 품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자네 혼자 잘 묵고 잘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방물장수 자고 간 그날 밤처럼 온종일 계속될 것 같았던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보증빛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술만 좋아하셨던가? 여자도 좋아하셨지. 자네는 몰랐지?”
“아이가, 헹수가 하나만 알제 둘은 모리구마, 양주도 잘 잡솼어. 읎으니까 못 잡솼지. 울 삼촌이 양주를 소주맹키 컵에 따라갖고 한방에 완샷을 때려 분 사나이 중의 사나이여"
금시초문이었다. 세 사람은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일상으로 되새기는 중이었다.
지향하는 세계, 살고 있는 세계,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부정하는 세계가 충돌하는 현실은 언제나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곳에서 촉발되는 어긋남과 아이러니가 정지아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 그리고 내가 공유하는 지점일 수도 있겠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의 주인공처럼 각각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일상을 살아야 하는 게 운명이라면 그 또한 나쁘지만은 않겠구나 싶다. 가야 할 세계와 직면한 세계, 그 대결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이유도 없다.
소설이 첨예하고도 미묘한 생의 문제를 다루는 장르라고 할 때 영화는 그 미묘하고도 첨예한 갈등을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짓게 하는 매력이 있다. 물론 허망한 귀결에 허탈하게 웃게 되지만, 그 마뜩지 않는 결말 때문에 또 현실을 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