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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과경계 Aug 26. 2024

격동의 말이 위로가 된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필요한 편파성

지난 호에서 도정일의 <대학교육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란 글을 소개했다. 도정일은 한국의 대학에서 교양교육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직설적 어법과 사례로 말한다. 그의 주장은 선명하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논거도 그렇다.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최초의 근대적 과학공동체인 런던왕립학회의 모토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목소리에는 저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도정일의 글에는 기존 대학의 교양교육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잘 드러난다. 아래 글에굵은 표시를 부분을 보 잘 수 있다.  


   최근 어떤 대학의 교무위원회 자리에서 이렇게 발언한 보직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 대학 신입생들은 교양과목 듣느라고 공부와 멀어지고 있다. 무슨 조치가 필요하다.” 교양과목 듣느라 공부와 멀어진다? 다수의 보직 교수들, 특히 전공학과 교수들의 머릿속에 ‘교양’이란 것이 어떻게 인식되고 이해되는지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이 아는 교양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잡동사니 상식 같은 것, 백화점 문화센터 꽃꽂이 강의 같은 것, 금강산도 식후경이랄 때의 그 ‘식후경’ 같은 불요불급의 장식성 액세서리 같은 것, 본격적인 공부와는 관계없는 어떤 것이다. 놀랍게도, 대학 전공학과 교수들 가운데 줄잡아 80퍼센트 이상은 교양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틀려먹은 ‘교양관’으로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다 퇴임한다. 퇴임 전에라도 자신의 틀린 생각을 바로잡는 교수는, 미안한 얘기지만, 극소수다.


실랄한 비판은 교양과목을 담당하는 교수나 인문학자에게는 너무도 반갑니다. 대학에서 교양과목과 강좌수를 결정하고 집단, 공과대, 예술계, 체육계열 전공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사례를 미국대학 하버드로 들고 있다. 한국 대학의 틀려먹은 교양에 관한 대다수 교수 인식에 반해 하버드 대학 학부과정은 개편 보고서는 너무도 이상적이다.

     

 하버드대학은 2007년 학부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낸 보고서에서 “하버드 교육의 목적은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실시하는 데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쪽에서 ‘리버럴 에듀케이션’(liberal education)이라 불리는 것이 지금 한국에서 ‘교양교육’이다. 두 용어의 의미와 역사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해방 후 미국 학제를 도입하면서 그쪽의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교양교육’이라 번역해서 수입한 것은 매우 불행한 사건에 속한다. 리버럴 에듀케이션이란 상식적 잡식 교육이 아니라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탐구와 교육’이다. 틀에 가두고 갇히는 교육 아닌 틀을 깨고 나가는 교육, 기성의 진리체계, 지식, 진리주장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비판적 사고력의 함양, 지식의 단순 전수와 답습보다는 전수를 넘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상상력, 호기심, 이해력의 자극과 확대-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 ‘틀을 깨고 나가는’ 교육으로서의 리버럴 에듀케이션, 우리식 표현으로는 ‘교양교육’이다. 문제는 서구식 교육방법으로서의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전통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이것은 중국·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점이다) 그 전통에서 나온 교육법을 가져다 정신과 알맹이는 빼고 ‘교양’이라는 모호한 말속에 담으려고 한 것이 우리의 교양교육이다.


잘못된 정신과 알맹이는 없는 교양이 동아시아 국가들에게서 발견된다는 말에서 미국 중심, 서구 중심의 그의 내면화된 가치관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다. 이런 사례는  이어지는 글에서도 발견된다.


  하버드 보고서에는 대학에서의 교양교육(리버럴 에듀케이션)의 성격과 목표를 간명하게 정리한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교양교육의 목표는 추정된 사실들을 동요시키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들 밑에,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폭로하고, 젊은이들의 방향감각을 혼란시켜 그들이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 총장들, 보직 교수들, 전공학과 교수들의 상당수가 지금부터 100번 이상은 읽고 새겨들어야 할 ‘교양교육론’이다.


한국의 대학 총장들, 보직 교수들, 전공학과 교수들이 100번 이상 읽고 새겨들어야 할 교양교육론이 하버드 보고서의 교양교육 목표다. 나에겐 통쾌한 말이다. 그렇지만 누가 듣느냐 누가 읽느냐에 따라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불쾌함 또는 적의감 혹은 분노가 일 가능성이 크다.


모든 글은 객관적일 수 없다. 어떤 입장을 지지하고 그것을 설득해 나가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도정일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희는 틀려먹었다, 너희가 학생들을 망치고 있다는 강력한 주장만이 맴돈다.


  교양은 단순 지식의 집적, 잡학과 다식, 박학을 넘어 기성의 진리체계를 동요시키는 힘,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고 심문하는 능력, 기존의 진리주장 어느 것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비판적 사고력, 현상의 배후에 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힘, 방향감각을 흔들고 혼란시켜 새로운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 틀린 것은 바로잡으려는 오류 수정의 정신- 이것이 ‘교양’이고 교양교육의 ‘목표’다. 교양은 전공 지식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으면서 지식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자율적인 정신의 생태체계, 거리낌 없이 탐구하는 모험적 호기심에 대한 대긍정의 체제다.  


지식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자율적인 정신의 생태체계와 거리낌 없는 탐구, 모험적 호기심은 어떤 목소리를 통해 재현되어야 할까? 가르치고 베풀며 교화하는 집단들 예를 들자면 레거시 미디어의 전문가들이나 교육을 책임진다는 대학교수들에게 과연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거침없는 말하기가 좋다(때론 그러하다). 우리 사회 주류에 흐르고 있는 경제성, 실용성 혹은 가성비 등의 가치와 정반대에 서 있는 그의 생각이 맘에 든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살고 있는 소수자에게는 격동이 아니라 위로다.   


최소한의 균형감각 그리고 누가 읽어도 불편하지 않은 글은 누구에게도 만족감을 줄 수 없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말은 강자와 기득권자를 향할 때 무해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틀려먹었다고 말해도 괜찮다.

   

  그런데 교양과목 듣느라 학생들이 공부와 멀어진다고? 이렇게 말한 교수는 필시 대학 1학년 때에도 공부해야 할 전공지식이 있는 법인데 교양수업이 그 전공 공부의 시간을 뺏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낸 것이리라. 그러나 교양은 공부와 멀어지게 하는 시선분산의 놀이가 아니라 공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능력을 키우자는 노력이고 생각하는 힘 기르기다. 그것 없이 대학공부는 되지 않는다. 대학을 나온 다음에도 대학이 길러주려는 그 교양의 힘만큼 요긴하고 중요한 것이 없다. 나는 앞서 하버드 보고서만을 예로 들었는데, 그 보고서가 교양교육의 목표라고 부른 것은 사실은 하버드 한 곳만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근대 학문과 근대 교육의 체계를 받아들인 세계 모든 주요 대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천명하고 있는 교양론이다. 그 교양론은 사실은 근대 과학혁명 이후 과학이 천명한 탐구의 방법론이고 정신이며, 분야가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사실상 모든 학문 분야(예술까지도 포함해서)들이 공유하는 방법이다. 그 교양을 통해 과학과 인문학이 만난다. 기존의 진리주장을 심문하는 것은 근대 과학의 등장 훨씬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가 확립한 대화적 교육법의 진수다. 최초의 근대적 과학공동체인 런던왕립학회가 만들어진 것은 350년 전의 일이다. 그 왕립학회의 모토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토는 과학의 것이자 동시에 인문학의 것이며 교양교육의 것이다.   


매우 감정적이며, 서구지향적이며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글에 안도한다. 나에게도 용기 내어 말할 자유가 있다. 그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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