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틈과경계 Sep 02. 2024

염려사회에 대한 단상

카르페 디엠(Carpe diem)!

편파와 편향은 일상이다.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다. 글쓰기도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글은 분명한 내 생각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다만 방향성은 중요하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일 수는 있지만,  사적인 욕망을 당연시하고 정당화하는 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10여 년 전에 게재된 강신주의 글이다. 이 글을 읽은 10대 혹은 20대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10대와 20대를 싸잡아서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5060 세대가 혹은 3040세대의 반응과는 다를까? 혹 공유의 지점은 없을까? 어떤 세대에 속하든 일단 한번 읽어보시라.



우리는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


강신주 (철학자) 경향신문 2012.07.08.     


  TV를 틀면 유명 원로 연예인의 익숙한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에서 보험을 들기가 만만치 않은 노년층을 상대로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혹하는 광고의 한 대목이다. 장례비 등 자신이 갑자기 떠날 때 자식들이 떠안아야 할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자식에 대한 마지막 사랑이 아니냐는 은근한 훈계도 뒤따른다. 미래에 대한 염려를 조장하고 그 염려를 보험으로 완화시키라는 자본의 유혹이 무섭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돌아보자. 과연 노인들만 미래를 염려하고 있는가? 초등학생에서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특목고나 자사고에 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고등학생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으며, 대학생들은 취업을 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있다. 심지어 직장인들은 실직이나 당하지 않을지, 혹은 너무 이른 은퇴 뒤의 삶이 어떨지 염려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온통 미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사회, 즉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

  염려가 과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내일 일정에 대한 염려가 지나치면 그는 오늘 하루를 제대로 보낼 수가 없다. 애인을 만나 행복을 느낄 수도, 고뇌에 빠진 후배의 하소연을 들을 수도, 길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자의 삶에 비통할 수도, 심지어 지금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의 맛을 음미할 여력조차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통째로 오늘 하루를 내일 일정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 일정이 끝나면 그는 미래에 대한 염려를 그치게 될까. 그렇지 않다. 내일이 되면 그는 모레를 염려하게 될 것이다.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면, 우리의 현재는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행복은 내일로 연기된다. 물론 그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 오늘 고생하는 것은 모두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좌우명, 그러니까 오늘은 힘이 들지만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신념에는 심각한 아이러니가 잠복해 있다. 내일이 오늘이 되는 순간, 모레가 또 내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잡을 수 없는 파랑새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행복을 약속해 준다던 내일이 계속 고통스러운 오늘로 변할 테니까. 결국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머리가 온통 내일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매력적인 이성과의 데이트도, 근사한 지역으로의 여행도 그에게는 별다른 기쁨을 줄 수 없으니까. 또한 이 사람은 잔인한 사람이다. 노숙자의 비참한 삶도, 그리고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이웃의 불안도 그에게는 별다른 느낌도 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를 불행하고 잔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독한 자아로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서, 우리의 사랑과 유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내일을 지나치게 염려하면 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애인, 친구, 후배,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법이다. 당연히 이 상태에서 우리는 그들의 말에 화답할 수도, 그래서 사랑과 우정이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이처럼 염려는 누군가 함께 있으면서도 그와 공감하고 유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항상 억압 체제는 다수의 사람들을 깨알처럼 분리시키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체제가 이런 좋은 계기를 간과할 리 만무하다. 체제는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 소수가 다수와 전면전을 벌여서는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체제 입장에서 미래를 염려하는 인간의 심리는 너무나 유용한 것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미래만을 신경 쓰면 쓸수록 우리에게는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은 그만큼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잊지 말자. 외부의 타자와 만나고 공감할 때, 우리는 자신이 바로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는 것을. 결국 현재는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가 가능해지는 시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체제가 염려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체제는 고민하고 다시 고민한다. 염려를 어떻게 하면 더 증폭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깨알처럼 고독한 자아로 파편화할 수 있을까? 위대한 현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나치라는 파시즘 체제와 연루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나중에 불가피했던 일이라고 부인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일련번호 312589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진성 나치 당원이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개념이 바로 ‘염려’, 즉 조르게(Sorge)였다. 결국 하이데거는 당시 독일인이 서로 유대하고 연대하여 독일의 산적한 정치경제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뛰어들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삶을 옥죄는 난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만을 염려하고 있는 독일인들이 모든 난제들을 한방에 해결해 준다는 히틀러의 약속에 환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염려가 깊을수록 파시즘적 체제가 도래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아니 정확히 말해 파시즘적 체제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염려를 증폭시키지 않는다면 탄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느 사회가 얼마나 파시즘에 노출되어 있는지의 척도는 항상 사회 성원들이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염려의 정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파시즘적 체제만 인간의 염려를 증폭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파시즘보다 더 노골적으로 염려를 증폭시키는 체제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자본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불확실한 미래상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금융상품들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대자본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이웃들의 고용 조건을 불안하게 만든 당사자가 누구인가? 그런 그들이 다시 미래를 염려하는 우리 이웃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여 다양한 연금과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우리의 염려를 증폭시키는 정치 체제나 경제 체제를 바꾸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물론 체제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고독한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 이웃들 사이의 공감과 유대가 없다면, 어떻게 압도적인 구조를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체제가 증폭시킨 염려라는 심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완전 딜레마다. 억압 체제가 극복된다면 우리의 염려 상태는 완화될 것이다. 우리의 염려 상태가 완화되지 않는다면, 억압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공감과 연대를 불가능하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억압 체제가 없어지기를 기다리지는 말자.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증폭된 염려 상태를 완화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염려가 전제하는 시제인 미래를 부정하는 것이 그 출발점일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말이다. 사랑과 우정을 진정으로 나누고 싶은가? 이웃들과 공감과 연대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시제, 즉 현재,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꽉 잡을 일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