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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화 May 29. 2024

현해탄에 던져진  고독한 꽃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최초의 대중가수, 최초의 국비유학생,  당대 최다음반판매량 기록자, 최초의 방송국 여류사회자, 최초의 현 해탄 정사 등등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무척 많습니다. 고작 삼십여 년 남짓한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녀의 인생은 현해탄의 물결처럼 파 란만장하고도 거침없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사의 찬미’의 주인 공 윤심덕(尹心悳 : 1897 ~ 1926)입니다.   당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본 국비유학까지 다녀온 그녀 는 빼어난 미모와 가창력으로 당대 최고의 스캔들메이커였으며 늘  화제의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희곡작가이자 촉망받는 엘리트였던 연 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 정사로 생을 끝마치면서 당시 사회에 큰 충 격과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요. 현해탄 정사는 그들이 처음 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당시 페시미즘(pessimism : 염세주 228 229 의, 비관론)의 사회분위기를 타고 모방 행위도 유행처럼 번져 한동안 사 회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연인과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기에 정사를 선택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윤심덕 씨를  이 자리에 소환해서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여 러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평양 제일의 왈녀,  마침내 세상의 중심에 서다

 인터뷰어 안녕하세요, 윤심덕선생님. 


 윤 심 덕  예. 조선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입니다. 반갑습니다. 이  자리를 빌러 저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모두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어 우선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을 것 같아요.

 

윤심덕 학교 다닐 때 별명이 ‘왈녀’, ‘말괄량이’, ‘대장’ 이런 것 들이었어요. 옛날 할머니들 말씀으로 하면, 어려서부터 계집에가 사 내아이처럼 기가 드샜지요.  어릴 적에 평양의 부촌에 살았지만 저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어 요. 1남 3녀 중 둘째딸. 아버지는 풋나물 장수였는데 입에 풀칠하기 도 어려웠지요. 매사 적극적이고도 강한, 전형적인 평양여자였던 엄 마가 생계를 책임지셨죠.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는데 그 때 문에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 눈을 뜨셨죠. 엄마는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어려운 살림에도 저희 자매들을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고등교육까지 시켜주셨지요. 당시 같은 또래 여자들은  학교 근처에 얼씬도 못하던 때였죠.  저는 강직하고 이치에 밝은 어머니의 성품을 빼닮았어요. 소학교 에 들어가자마자 교회활동과 어머니에게서 배운 노래며 성경지식으 로 두각을 나타내서 반장을 도맡아했고, 자화자찬이지만 영특해서  학업성적도 우수했어요. 친구도 남녀나 나이에 구분을 두지 않고 사 귀었고, 워낙 성격이 괄괄하고 활발해서 짓궂은 상급반 남자아이들 까지 제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굴었어요. 한마디로, 리더십 강한 ‘골 목대장’이었지요.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우리 형제들은 철 이 일찍 든 편이었지요. 저는 둘째였지만 어려서부터 항상 집안의 기 둥역할이었어요. 특히 제 음악적 재능은 학교, 교회, 동네를 넘어서  나중에는 평양시내에까지 소문이 자자했지요. 어릴 때부터 음악이  참 좋았어요. 얼마나 좋았으면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도 멀리 서 교회의 찬송가가 들리면 밖으로 무작정 뛰쳐나가 부지깽이를 들 고서 팔을 휘저으며 지휘를 했겠어요. 저는 어떤 노래든 한번만 들으면 완벽하게 기억해 따라 부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저보고  음악의 천재라며 감탄했죠. 


 인터뷰어 그럼 그 때부터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신 겁니 까? 현대와는 달리, 당시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직업으로 삼 기가 매우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요.  


윤 심 덕 인프라가 아예 전무했지요. 속된말로 완전히 맨땅에 헤 딩하기,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어요. 제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계속 공 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헌신 외에도 한 분의 노고가 더 있 습니다. 제게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신데, 미국인 의사 홀부인입니다.  소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 집은 시골에서 평양으로 다시 이사를 가 게 됐지요.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여섯식구가 먹고 살기 어려워서  엄마가 일을 해야 했는데 시골보다 평양이 일자리가 있었으니까요.  교회를 통해 인연이 된 게 바로 평양 광해병원이었어요. 엄마는 그곳 에서 사무를 보셨는데, 한 미국인 여의사가 유독 나를 예뻐하셨습니다.   내 영특함과 재능을 꿰뚫고, 경제적 후원을 약속하시며 의사가 되 라 하셨지요. 가난한 조선에는 예술가보다 의사가 더 절실할 거라면 서 저를 설득했지요. 부모님도 제가 홀부인처럼 의사가 되기를 원하 셨지만, 끝내 저는 의학공부가 아닌,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조 선 최초의, 최고의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윤 택하나 홀부인을 보며 느낀 의사의 매일 반복된 일상에 회의를 느껴  서였습니다. 매일 병원 안에서 아픈 사람들만 보는데 얼마나 재미없 고 답답할까요? 그래서 저는 의사가 되기 싫었습니다. 홀부인은 내  뜻을 존중해주셨고, 음악가의 길을 걷더라도 후원을 멈추지 않을 것 을 약속하셨지요. 내가 경성여고보 사범과(현 경기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그 분은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평양에서 튀던 아이가 서울이라고 안 튀겠습니까? 서울에서도 물 론 튀었지요. 늘 우등생이었고, 여전히 음악적 천재였으며, 말괄량이 였지요. 자수솜씨가 좋아서 기숙사 친구들한테 자수용품을 팔아 제  용돈과 평양집 생활비를 보태기도 했고요. 졸업 후, 1년쯤 원주, 춘 천 등지를 돌며 적성에도 안맞는 교사를 했어요. 얼토당토않은 산골 마을에 발령이 나서 총독부 학무과장의 멱살잡이도 해봤고요. 당시  사범과는 관비로 공부했기에 의무적으로 1년 간 교사직에서 봉사를  해야 했지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내 나이 열아홉에 드디어 일본  유학길이 열렸어요. 일본 총독부 장학생선발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1915년 4월 마침내 도쿄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어요. 내 파 란만장한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반짝반짝 빛이 나던 시기였죠.  


 인터뷰어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서 요즘 말로 하면 ‘퀸카’로 통했다죠? 


 윤 심 덕 사교성이 남달라서 화가 겸 문인이었던 나혜석 다음으로  제가 인기가 많았지요. 한 남학생은 만날 꽃다발을 바치며 프러포즈 를 했는데 제가 거절하자 미쳐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었고. 그에 게 미안한 마음이야 있지만 싫은 것을 좋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메이지유신의 영향으로 당시 도쿄의 분위기는 우리 조선과 많이  달랐어요. 비교가 안됐지요. 밤늦게까지 오페라와 영화를 봤고 모든  게 자유로웠어요. 제가 꿈꾸었던 곳이었지요. 그렇게 흥청망청 즐기다 보니, ‘조선의 윤양’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인터뷰어 그럼 도쿄 유학시절에 연인 김우진 씨를 만난 것인가요?  


윤 심 덕 예. 당시 김우진씨는 와세다에서 얀극을 공부하고 있었 는데 처음에는 서로 관심이 전혀 없어서 소가 닭 보듯, 닭이 소 보듯  했지요. 흥, 무슨 저런 건방진 계집애가 다 있어? 어디 목포 촌뜨기가? 하며 서로 같잖게 봤어요.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그는 조혼을 헤  고향에 아내와 자식이 있었고 일본인 간호사 여자친구도 있었으니까 요. 또 내가 요즘 말로 하면 남사친(남자사람친구)에게 허물없이 대해서 오 해도 많이 샀는데, 나는 나만 결백하면 된다는 생각이어서 신경도 안 썼지요.   어쨌든 김우진씨와는 조선 유학생들이 얼마 되지도 않고, 서로 종 종 뭉치다 보니까 한번씩 보면 눈인사정도 나누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러던 게 김우진씨가 조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극단 ‘동우 회’에 나도 함께 하게 되어 방학 중에 잠시 귀국, 전국 순회공연을 했 어요. 그가 그때부터 나를 눈여겨봤다고 해요. 노래도 잘하고 묘한  매력이 있어서.   한번은 그가 자기 집에 초대를 해서 동생들과 함께 목포에 갔는데  세상에 그렇게 큰 집은 처음 봤어요. 사람이 어찌나 검소한지 부잣집  아들 티를 전혀 안내서 몰랐지요. 알고 보니 목포 만석꾼 장남이었어 요. 근데 그이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돈과 권력에 타락한 자기 아버지를 증오하고, 부르주아의 자식이라는 것에 심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어요. 단 한번도 돈으로 위세를 부리거나 사람을 함부로 대 하지 않는 딸깍발이 선비같은 사람이었어요. 나는 그런 그에게 감명 받았고요. 내가 사람들의 오해와 따가운 시선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진심어린 조언과 위로를 아끼지 않았지요. 내겐 그가 정신적 지주 였어요.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많이 사랑했냐, 라고 묻는다면 분 명 나일 거예요. 자존심 상하지만 그는 나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어요.  함께 죽는 순간까지도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려웠어요.   <이하 중략>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책에 나와 있습니다.

  #윤심덕 #한국의_역사인물_가상_인터부집 #홍지화 #단숨에_읽는_ 짧은_역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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