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시대의 암흑을 가로지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족, 웃음, 그리고 앎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라질은 1964년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의 쿠데타 이후 21년 간 군부 독재 시기를 겪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사법 절차 없는 사형과 구금, 극심한 검열 그리고 강제 실종과 고문이 횡행했습니다. 공식 조사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총 434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되고 2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1962년 브라질 노동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후벤스 파이바는 쿠데타 이후 독재를 비판하고 국외로 추방당한 반체제 인사들의 가족이 연락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운 혐의로 1971년 체포되고, 실종되었습니다. 브라질 당국은 후벤스가 군 병영 내에서 고문의 결과로 사망했음을 후에 인정했으나 그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습니다. 에우니시 파이바는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한 여성으로 23세에 후벤스 파이바와 결혼한 이후에는 가족과의 삶 및 문화 활동에 집중하며 지냈습니다. 에우니시가 41세의 나이에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인권 운동가로 살아간 것은 남편이 실종되고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리우데자네이루를 떠나 상파울루로 돌아간 다음부터였습니다. 두 사람의 막내아들인 마르셀루 후벤스 파이바는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자 가족들이 겪었던 일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아임 스틸 히어>는 그렇게 쓰인 동명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올해 제가 본 영화들 중 저를 가장 울컥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실제로 울음이 나지는 않았지만 감정적으로 상당히 많이 흔들렸고, 영화에 대한 인상이 며칠 만에 빠르게 희미해져서 좀 의아하던 찰나 리뷰를 정리하면서 다시금 벅차오르는 경험을 했습니다. 특이하게도 가장 울컥했던 장면에서 주인공 에우니시는 정반대로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아버지 없는 가족사진을 찍을 때도, 마침내 남편의 사망진단서를 수령할 때도 그녀는 더없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죠. 이 영화에는 인물이 먼저 엄살을 떠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감독인 바우테르 살리스는 에우니시가 우는 장면을 영화에서 모두 잘라냈다고 합니다. 영화 내내 에우니시는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도 한순간도 위엄을 잃지 않습니다. <아임 스틸 히어>는 젠더 정치를 전혀 끌고 들어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손에 꼽을 만큼 훌륭한 여성 서사이고, 제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브라질의 참혹한 역사를 다룬 시대극으로서가 아니라 에우니시 파이바라는 여성의 이야기로서입니다.
그냥 대뜸 아쉬운 점부터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분명히 영화에 대한 감흥을 낮추는 포인트라고 생각하고 여러 번 생각해봐도 아쉽지만, 그렇다고 이게 치명적인 문제라고 생각지도 않을 뿐더러 이 이야기를 리뷰의 끝에 붙임으로써 감정적인 여운을 훼손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아예 처음에 해치워버리는 게 좋겠어요.
저는 상술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영화의 에필로그들, 특히 두 번째 에필로그가 사족이라고 느꼈습니다. 알츠하이머로 인해 의식이 온전치 않아 보이던 에우니시가 TV에서 군부 독재와 범죄에 대한 뉴스가 나오자 고개를 천천히 들고 화면을 또렷하게 응시합니다. 이 장면은 드라마적으로 앞부분과 잘 융화되지 않는 듯합니다. 물론 감독이 이러한 마무리를 포기할 수 없었을 거라는 추측은 됩니다. 브라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의 만행을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주시하고 있고, 에우니시 파이바조차 과거의 일에, 여전히 시신을 찾지 못한 남편의 이야기에 정신을 퍼뜩 차렸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자막으로 나오는 후일담에 의하면 2014년 5명의 군 장교와 경찰이 기소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때 에우니시의 얼굴을 정확한 정면 클로즈업으로 잡은 것에도 분명 의도가 있을 거고요.
하지만 에우니시가 리우데자이네루를 떠난 이후 남은 가족들과 새로운 삶을 일궈나가기까지, 또 정치적으로 투쟁해서 후벤스의 사망진단서를 받아내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생략되어 있어서 에필로그에는 상대적으로 힘이 덜 실려 있습니다. 앞부분의 잘 축조된 서사를 이어받아 드라마를 종결짓기보다는 감독이 하고픈 말로 드라마 위를 슬쩍 덮어씌운 인상이랄까요. 저는 드라마 측면에서의 방점이 그녀가 이전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새 삶을 찾아 떠나는 곳에 찍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비우를 조수석에 태우고 에우니시가 차를 출발시키면서, 혹은 베로카가 거리를 향해 필름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하면서 영화가 이대로 끝나도 거의 완벽하겠다고 느꼈으니까요. 1996년을 다룬 첫 번째 에필로그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드라마의 연장선상에 남아 있습니다. 1971년 당시 엄마를 감싸주기에는 너무 어렸던 남매 바비우와 마르셀루를 에우니시와 연결시키는 측면이 있기도 하고, 똑같이 정면 클로즈업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때의 에우니시는 사망진단서를 스크랩한 후 가족사진과 베로카의 필름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하죠. 그러나 2014년 배경의 두 번째 에필로그는 그보다도 더 붕 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화가 시간대를 한 번씩 뛰어넘을 때마다, 이전까지의 시퀀스에서 받았던 감흥이 툭, 툭 깎여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데에 정치적 목소리는 큰 몫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아임 스틸 히어>는 파이바 가족의 이야기지만 장르적인 의미에서 '가족 드라마'는 아닙니다. 이 가족들 사이에는 갈등이랄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때때로 투닥거리고, 베로카의 편지 때문에 에우니시와 엘리니아 사이에서 언쟁이 오가고, 리우를 떠나기로 한 결정에 엘리니아가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정도의 마찰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25년과 4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서로에게서 이탈한 사람 한 명 없이 여전히 화목하고 활기차며 옛 상처를 서로 보듬어줍니다. 이러한 묘사로 인해 서사나 캐릭터의 밀도가 손해를 본 부분도 일부 있겠죠.
그럼에도 구성원들 간의 갈등보다 집안의 공기에 주력하는 것은 이 영화의 의도된 방법론으로 보입니다. 특히 초반부는 주인공인 에우니시에게도 특별히 스포트라이트를 주지 않으면서 이 가족이 얼마나 생기 넘치고 화기애애한지 묘사하는 데 주력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 이 가족이 국가의 횡포로 인해 무엇을 잃었는지를 관객도 체감할 수 있도록 만들고, 둘, 한 덩어리로서의 가족을 제시함으로써 영화의 안타고니스트를 다른 누구도 아닌 시대와 국가로 고정시킵니다. 무엇보다 서로를 지탱하면서 끝끝내 무너지지 않는 이들의 모습 자체가 감동적입니다. 시대에 짓밟힌 사람들의 존엄성을 영화는 투쟁이나 저항이 아니라 가족애와 생명력에서 찾고 있습니다(사고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된 마르셀루를 다루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후벤스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확인받은 날 밤, 에우니시는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갑니다. 에우니시의 시선을 따라 해맑게 웃고 떠드는 다른 가족들과 친구들의 인서트가 이어지는데, 이들에게는 모두 아빠가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에우니시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이죠. 이 장면이 특히 탁월하게 느껴지는 것은 엄마의 멍한 시선을 한 박자 늦게 포착한 엘리니아와 날루가 차례로 그녀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기 때문입니다. 에우니시는 홀로 남아 다섯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가장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엘리니아와 날루는 그녀의 고통을 알아보고 이해할 만큼 사려 깊은 아이들이기도 합니다. 두 딸의 시선이 엄마의 시선을 뒤따르는 짧은 순간을 통해 우리는 세 사람의 슬픔이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에필로그에는 아이들 다섯 명 중 바비우와 마르셀루만이 등장합니다. 엄마와 다른 형제들이 고통을 겪던 당시 두 사람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엄마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런던에 있다가 뒤늦게 브라질로 돌아온 베로카에게도 영화는 엄마와 연결될 기회를 주었죠.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로카는 에우니시가 괜찮은지 반복해서 물어봅니다. 그리고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에우니시가 후벤스의 실종 사건에 대해 또렷한 목소리를 내는 동안, 카메라는 에우니시를 떠나 복도에서 인터뷰를 엿듣는 베로카를 비춥니다. 성인이 된 바비우와 마르셀루는 에우니시가 사망진단서를 수령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순간을 함께하며, 그날 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서로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 이로써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참혹한 상처는 가족 구성원 중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에우니시를 구심점 삼아 공유되고 치유되는 셈입니다.
에우니시는 지적이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초반부에 두 사람이 각자 친구 부부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후벤스와 가스파는 자신들이 표적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반면 에우니시는 새로 지을 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후벤스가 가족들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에우니시 모르게 정치적 활동을 해왔던 것을 고려하면 그녀는 정치 문제에서 소외되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가스파와 달바가 왜 그렇게 급히 런던으로 떠나려 하느냐고 에우니시가 묻자 후벤스는 가스파가 편집증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을 에두르죠. 온가족이 베로카가 런던에서 보내준 필름을 돌려보는 와중 누군가 집에 방문하는데, 이때 등장하는 쇼트 하나에 이 지점이 명확하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전경에는 에우니시를 걸고 후경에 후벤스와 집 안쪽으로 열린 문을 배치한 이 쇼트는 에우니시가 어떻게 후벤스로 인해 정치 문제에서 소외되어 있는지를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시각화합니다. 대화의 상대방은 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나누는 두 남자의 밀담은 들리지 않습니다.
에우니시가 가정주부에서 가장으로, 그리고 정치적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영화에서 후벤스의 자리가 사라진 이후부터입니다. 이를 영화적으로 드러내는 요소가 바로 그녀의 이름입니다. 영화는 후벤스가 체포되는 주요 사건 전까지 주인공의 이름을 한 번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집안을 무겁게 짓누른 공포를 진정시키기 위해 총을 든 남성들과 친밀감을 쌓으려 하고, 이때 "서로 소개가 늦었네요. 난 에우니시에요."라고 말하면서 관객에게도 처음 본인을 소개합니다. 이제부터 에우니시는 후벤스의 뒤에 안온하게 숨어 살 수 없습니다. 혹은 후벤스에 의해 소외되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그녀의 이후 삶을 고난과 역경으로 바라볼 것인지, 주체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겠죠. 물론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두 가지 모두라고 답하겠지만요. 12일 간의 감금 기간 동안 에우니시는 심문에 호출될 때마다 자기의 풀네임을 말하도록 강요받습니다. 남편을 잃고 독방에 갇힌 채 인권을 유린당하는 가장 참혹한 순간에 오히려 그녀의 이름은 더 똑똑히 발화되는 셈입니다.
12일 간의 감금 끝에 집으로 돌아온 에우니시는 이제부터 스스로 위기를 헤쳐나가야 합니다. 우선 후벤스가 군부에 의해 실종되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군부는 후벤스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그 사이 부정했고, 에우니시는 군 부지에서 후벤스의 차를 봤지만 군은 병영 내에 후벤스가 없다고 잡아떼기만 합니다. 동행했던 변호사 리노는 이들이 계속해서 부인할 것이기 때문에 다른 기관에 요청해도 소용없을 거라고 말하죠. 그러자 에우니시는 후벤스와 함께 체포되었던 아이들의 옛 담임 마르타를 찾아갑니다. 마르타는 처음에는 이 일에 더 엮일 수 없다며 발을 빼지만("이만 가주세요, 제발." "제 남편이 위험해요." "우리 모두 위험해요.") 나중에 늦은 밤 비를 맞으며 찾아와 증언을 보태줍니다.
대놓고 집이 감시당하기도 합니다. 길 건너편에 하루 종일 앉아 집을 바라보는 남자들이 있고, 에우니시는 아이들을 태우고 이동하면서 계속 뒤따라오는 차를 의식합니다. 결국 강아지 핌피우가 차에 치여 죽는 일이 터지자 그녀는 감시자들에게 다가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고 말죠. 감시자들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나면 에우니시는 쪼그려 앉은 채 핌피우를 내려다보는데, 이때 전경에서 그녀의 정측을 잡고 후경에 아이들을 배치한 쇼트는 그녀가 홀로 책임져야 할 가족들의 존재를 방금 벌어진 사건에 대한 감정적인 여파와 하나로 묶어 또렷하게 전달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위기까지 있습니다. 가정부 제제가 12월까지의 월급밖에 받지 못했다면서 돈을 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에우니시는 바로 해결하겠다면서 은행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계좌는 후벤스의 명의로 되어 있기에 남편의 서명 없이 그녀는 돈을 인출할 수 없습니다.
에우니시는 마침내 후벤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리우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마르타의 증언을 확보한 후 그녀는 리노에게 전화를 걸어 "후벤스가 체포됐다는 증거를 찾았어요."라고 말합니다. 가족들이 다같이 바닷가로 놀러가고 에우니시가 수영을 하는 바로 다음 장면은 상황이 개선된 것에 대한 긍정적인 리액션처럼 보입니다(수영은 첫 번째 에필로그에서 바비우를 에우니시와 연결시키는 또다른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닷가로 찾아온 친구 보카로부터 후벤스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말을 듣고 맙니다. 에우니시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보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후벤스가 석방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에우니시는 전과 달리 후벤스의 비밀스런 행위도, 국가의 폭력적인 만행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무지한 상태인 척 남아 있어야만 하죠. 이 시대의 에우니시는 철저하게 무기력합니다.
다음 날부터 그녀는 새로운 삶을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밟아나가기 시작합니다. 출금할 수 없는 후벤스의 돈 대신 새 집을 지을 예정이었던 부지를 팔고 받은 돈으로 제제의 밀린 월급을 주고, 그녀를 해고합니다. 베로카가 유학에서 돌아오고, 친척들이 있는 상파울루로 가서 대학에서 일을 할 거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에우니시의 단단한 결기가 돋보이는 이 대목은 두 가지 감흥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하나는 무너진 삶에 대한 비애. 새로운 집으로 대변되었던 미래에 대한 꿈은 사라졌고, 가족과 같은 사이였던 제제도 떠나보내야만 합니다. 담담한 그녀와 달리 아이들은 아직 아빠도, 리우에서의 삶도 단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짓밟힌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한 번의 엄살 없이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데서 느껴지는 위엄이 있습니다. 아버지 없는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이 이 수용의 시퀀스 사이에 들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 보입니다. 최소한 웃지는 말라는 사진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에우니시는 "그래도 웃자."라고 말하고 수 차례 "스마일!"을 외칩니다. 이 순간을 보면서 짙은 먹먹함을 느낀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니겠죠.
이 영화의 에필로그는 일견 에우니시의 억센 걸음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집니다. 25년 전 철저하게 무기력했던 그녀를 더 이상 짓눌려 있지 않아도 되는 세상 속으로 풀어주고, 사망진단서를 들고 언론 앞에서 여전히 환하게 웃음으로써 국가에 승리를 거두게 만들어줍니다. 이 또한 뭉클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또한 사회 드라마로서는 중요할지 몰라도 캐릭터 드라마로서는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부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앞에서 에우니시의 도약을 봤기 때문입니다.
바비우의 이가 빠지자 후벤스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이를 묻는 척하면서 딸 몰래 서랍 속에 챙겨둡니다. 이사를 준비하며 후벤스의 물건들을 정리하던 에우니시가 이를 발견하고는, 이사 날, 현관에 앉아 텅 비어버린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바비우에게 건네줍니다. 바비우는 이를 묻었던 곳은 아빠만 아는데 어떻게 엄마가 이걸 가지고 있느냐고 놀라죠. 그러자 에우니시는 "엄마도 아는 게 많단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에우니시는 1971년에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억압되어 있던 그 순간에도 결코 무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건 그녀가 자신의 삶에 닥친 가장 끔찍한 일을 발판 삼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대는 그녀에게 모르는 척하라고 강요했으나 그녀는 모르지 않았습니다. 1996년의 승리는 이미 1971년의 에우니시가 더 이상 무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리우를 떠난 이후 자신이 아는 바를 가지고 투쟁했기 때문에 쟁취할 수 있었던 결과입니다. 저는 <아임 스틸 히어>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 아무것도 몰랐던 자가 또렷이 아는 자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붕괴되지 않고 견고한 가족 간의 연대도, 깜깜한 시절을 인내한 후 현재까지 고개를 똑똑히 들 수 있는 정치적·역사적 투쟁도 모두 앎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