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의 <배트맨>(1989)은 <슈퍼맨>시리즈(1978-1987)의 계보를 잇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로서 1997년 <배트맨과 로빈>까지 4편에 이르는 시리즈로 갈 정도로 성공하였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엑스맨>등 대부분의 슈퍼 히어로 영화의 공통점으로는 ‘주인공은 초인적인 힘 갖고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처럼 이중생활을 한다. 막강한 힘을 가진 악당과 싸워 이긴다, 여주인공과 삼각 멜로가 있다, 화려한 무기와 볼거리로 가득하다. 개인적인 목적보다는 도시나 국가 등 보다 큰 정의를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 권선징악적인 주제가 있다.’등이 있는데, <배트맨>시리즈도 대부분 그와 같은 공식을 따른다. 단지 차이라면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된 배경이 대부분 외부적인 요인(행성 출신, 특수한 실험 및 유전자 조작 등)에 의한 것이지만 배트맨은 가족사와 관련되어 내부적인 요인과 엄청난 부를 이용해 자생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키우고 만들었다는 데 있다. (본 글 12-1,2,3편은 2011년 4월 학술등재지인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에 실린 나의 논문임)
호주의 미디어 학자 브라이언 포르테는 "배트맨의 다양한 얼굴들"이라는 주제의 보고서를 내놓으며 배트맨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산업적 캐릭터로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배트맨 캐릭터는 엔터테인먼트 분야는 물론 레저 분야에서까지 확장된 소비 영역을 지녔다. 자국 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똑같은 모델로 똑같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드문 캐릭터이자 캐릭터의 상업적 본성을 인식한 첫 번째 성공적인 만화 캐릭터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공포와 욕망을 동시에 반영한다. 대다수의 TV 프로그램과 영화는 한시적인 효과만을 거두는데 그쳤지만 배트맨은 수십 년간 꾸준히 그것을 해냈다"
이 같은 분석처럼 <배트맨>시리즈의 잇따른 성공은 또 다른 슈퍼 히어로 시리즈 <스파이더맨>(2002), <엑스 맨>(2000)시리즈 등을 탄생 시켰고 그들 역시 대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 산업으로서의 할리우드는 주로 온갖 방식의 기술을 동원하여 계속해서 스스로의 모습을 확대 재생산해 갔다. 특히 컴퓨터는 영화감독들이 특수효과를 사용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생생한 행동과 동영상을 만들어 냈으며 실사장면과 그래픽 영상이 거의 기적에 가깝게 어울렸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인 혁신에도 불구하고 서술체 제작의 근본적인 이념이 변하지 않았기에 영화 만들기의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변함이 없었다. 즉 슈퍼 히어로 나오는 원작만화를 주인공으로 한 대부분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기술의 진보 덕에 볼거리로서 산업적인 성공과 유행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그 내러티브 전개와 주제의 진보는 그다지 없었다는 것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도 동시대 문화생활의 상상적 지평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구식 플롯에 캐릭터도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Christopher Nolan)이 ‘배트맨’을 다시 부활시켜 새롭게 재해석하여 만든, 즉 리부트한 <배트맨 비긴스>(2005, Batman Begins)와 <다크 나이트>(2008, The Dark Knight)는 기존의 슈퍼 히어로 영화들에 2%로 부족한 내용과 주제를 채워 넣음으로서 그야말로 ‘명품 블록버스터’의 시대를 열었다.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기록 5위에 오름과 동시에 일부 사이트 조사에서 2000년대 10년간 최고의 걸작으로 선정된 <다크 나이트>는 묵직한 ‘선악과 도덕의 딜레마’라는 철학적인 화두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도 어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뒤지지 않을 만큼 극적인 재미와 진화된 비주얼을 담아내었다. 과연 크리스토퍼 놀란은 어떻게 해서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영화는 왜 그렇게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 글은 그러한 의문을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 대한 연출 분석을 통해 일부나마 풀어보고자 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썸니아>를 제작했던 워너 브러더스의 배트맨 시리즈 제안에 관심을 갖고 배트맨 류의 코믹북에 정통한 시나리오 작가 데이빗 S.고이어를 끌어들여 시나리오를 완성하였다. 결과적으로 놀란이 만든 <배트맨 비긴스>는 단순한 시리즈의 연결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진화된 새로운 배트맨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다음 작품 <다크 나이트>을 위한 일종의 예고편일 따름이었다. <대부>라는 작품이 있었기에 보다 깊이 있고 존재감 강한 <대부2>가 나온 것처럼, <베트맨 비긴스>가 있었기에 <다크 나이트>같은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을 비롯한 주요 인물 캐릭터나 영화 속의 소품, 배경 설정, 액션 연출 스타일 등 많은 부분이 <배트맨 비긴스>에서 이미 다져놓은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다크 나이트>는 전편에서 창조된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고담시에 미치는 영향은 과연 어떻게 될까? 그리고 악의 무리로부터 고담시를 구해내기 위해 탄생한 배트맨의 대항마로 등장한 조카와 대립구도는 어떻게 전개될까에 대한 기대감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전 배트맨 시리즈와 달리, 그 두 작품은 본 시리즈나 대부 시리즈에 비견될 만큼 결속력이 강한 명품 시리즈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팀 버튼이 처음 <배트맨>을 영화화할 때 프랭크 밀러의 만화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스>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놀란 감독의 <베트맨 비긴스>와 <다크 나이트>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 정신과 정치, 사회, 철학적 세계관을 거칠 것 없는 과격한 묘사로 표현해 낸 프랭크 밀러의 만화는 원작자 밥 케인이 애초에 배트맨에게 부여했던 어둡고 비딱한 본래의 성향을 더욱 과격하고 직설적으로 살려냈으며 그로 인해 전체 코믹스 산업에서 암흑의 영웅들을 일으켜 세웠다. 만화 팬들은 밀러를 통해 슈퍼 히어로의 욕망과 욕구, 삶의 동기를 알게 됐고, 그로 인해 슈퍼 히어로는 심각하고 현실적이며 폭력까지 행사하게 됐으며 배트맨은 더 이상 십대용 코믹스가 아닌 성인용 문학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봅 케인, 프랭크 밀러, 팀 버튼 등 과거의 70년 역사의 배트맨 만화와 영화의 장점을 모두 뽑아내어 새롭게 창조한 21세기형 슈퍼 히어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