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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Che Apr 08. 2022

다크나이트: 연출 분석

영화는 거울이다(12-2편): 시나리오 해부

<다크 나이트>의 연출 분석

한 편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바둑에서의 복기처럼 감독의 시각에서 되짚어 보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다크 나이트>의 연출 분석은 지면상 한계는 있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어떻게 연출했을까를 역으로 되짚어 보면서 그 작품이 왜 걸작이면서 동시에 블록버스터 흥행작이 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적절히 찾아온 나름의 운도 있었겠지만, 그가 사전에 준비된 감독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다크 나이트>는 슈퍼 히어로 영화지만, 굳이 장르로 정확히 따지자면 갱스터 범죄 스릴러에 가깝다. 배트맨이나 그 세계 속 악당은 초능력을 지닌 다른 슈퍼 히어로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사실 범죄 스릴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데뷔작 <미행>부터 가장 최근 <프레스티즈>(2006)까지 일관되게 선호한 장르다. 대신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완 달리, 대부분의 작품에서 철학적인 독백을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인간의 정체성 및 선악의 딜레마 문제를 복합적인 구성으로 심도 있게 접근해 왔다. 특히 그는 범죄 해결보다 하나의 범죄로 인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질 및 도덕적인 딜레마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쳐 온 것이다. <다크 나이트>는 기존 영화에 비해 구성은 훨씬 단순화 시키면서 주제와 캐릭터를 훨씬 심도 있게 파고 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놀란의 기존 슈퍼 히어로 액션 스릴러 감독들과의 연출 스타일의 차이점은 상황에 대한 그럴듯한 개연성을 부여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가령 1990년대 배트맨 시리즈를 보면 상황과 액션에 대한 개연성보다는 화려한 볼거리와 자극적인 액션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놀란은 그런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이전 영화들에선 대충 넘어갔던 부분들, 예를 들면 주인공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의 복장이나 가면을 쓰게 된 동기나 그 실용성 문제 같은 것에 철저히 그 동기와 과정, 그리고 리얼리티를 설명하고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상영시간이 26분 정도 길어지긴 했지만(<배트맨> 126분/<다크나이트> 152분), 그렇다고 설명이 지루하지 않다. 블록버스터에서 필수적인 화려한 볼거리와 액션 스릴 장면 역시 보다 한 차원 높여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에서 감독의 연출은 시나리오 창작부터 촬영과정에서의 제반 시각 묘사, 그리고 후반 작업에서 편집과 사운드의 총제적인 부분, 그리고 최종 프린트가 나올 때까지 책임이 있다. 물론 제작자와 관계에 따라 책임의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놀란 감독은 전작 <배트맨 비긴스>의 성공에 힘입어 보다 완벽한 통제를 할 수 있는 위치에서 <다크 나이트>를 연출했음이 예상된다. 


1)시나리오

<베트맨 비긴스>의 시나리오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직접 데이빗 S. 고이어와 공동 작업을 했지만, 풀리처 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심오하고 시적(more depth and poetry)이라고 극찬한 <다크 나이트>의 시나리오는 친동생인 조나단 놀란과 공동으로 작업하여 완성하였다. 그러기에 시나리오는 연출 분석의 첫 단계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배트맨 비긴스>는 그야말로 한 번도 이전의 원작 만화와 영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배트맨의 과거와 그 영웅의 기원을 창작해서 쓴 내용이지만, 조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크 나이트>는 기존의 봅 케인과 프랭크 밀러의 만화, 팀 버튼이 만든 영화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각색 작품이다. 이 작품에선 본격적으로 배트맨이라는 존재가 고담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파헤치고, 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의 적들도 더 강해지고, 결과적으로 그 둘 사이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① 주제선악의 존재론적 딜레마동시대 의식 반영

팀 버튼의 <배트맨>은 배트맨에 의해 악당 조커가 죽고, 고담시에 평화가 온 뒤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도 이뤄지는 식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는 기존 슈퍼 히어로 영화들처럼 선악 대결에서 정의가 악을 물리치고 승리한다는 투의 그런 도식적인 주제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일단 차원을 달리한다. 물론 피상적으로는 선을 대변하는 배트맨이 악을 대표하는 조커를 물리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은 조커를 완전히 죽이지도 못하고(영화에선 조커가 줄에 매달린 채 있고 경찰들이 그에게 다가선 것으로만 끝낸다), 결국 그가 투 페이스 하비 덴트가 저지른 살인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경찰에 쫒기는 것으로 끝낸다. 관객 입장에서 배트맨은 분명 선을 행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담 시민들의 시각에선 범죄자가 되어 쫒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의 내면적 고통을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일반화된 ‘슈퍼파워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차원 이상으로 끌어올린 점에서 획기적이다. 밤의 수호자였던 그는 자기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늘어나자 밝은 대낮에 정의를 실현하려는 하비 덴트에게 자신의 임무를 넘기고 일반인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그는 조커의 계략에 발목을 잡힌다. 조커가 배트맨에게 “네가 모든 것을 영원히 바꿔놓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배트맨의 존재적 갈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배트맨은 혼란에 빠진 고담시를 구해내(는 듯 보이)지만,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한다. 배트맨의 출현은 작게는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과 사이비 배트맨 같은 자경단원을 양산했고, 크게는 조커 같은 악당이 의도하는 거대한 카오스(혼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기준을 충돌시켜 선악의 경계점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조커의 대사 ‘난 널 죽일 수 없어. 네가 나를 완성시키니까 말야’, ‘시민들에게 넌 나처럼 그저 괴물일 뿐이야’에서 드러나듯이, 절대 악의 화신인 조커를 창조한 장본인이 바로 배트맨이라는 절대 선이다. 각자가 대변하는 선과 악은 하비 덴트의 투 페이스(two face)처럼 공동운명체일 수밖에 것이다. 놀란 감독은 일찍이 철학자 니체가 ‘선과 악이 창조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선 파괴자가 되어 모든 가치를 부숴야 한다. 결국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고 갈파한 도덕 철학을 절묘하게 <다크 나이트>의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선악의 미묘한 갈등으로 존재론적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심도 있게 파헤친 슈퍼히어로 영화는 이전에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평가받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시대감각이다. 미디어 학자인 아더 에이사 버거가‘만화와 문화"라는 논문을 통해 "1930년대는 위험한 시기였다. 경제는 어렵고 범죄는 도처에 깔렸고 미치광이들이 세계를 위협했다. 당연히 영웅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시대였고 코믹스는 이 분위기를 감지했다"고 분석했듯이 배트맨은 탄생 초기부터 시대정신을 반영한 캐릭터였다. 그러기에 21세기에 만들어졌다면 당연히 동시대의 시대성을 제대로 담아 낼 필요가 있었고, 놀란 감독은 그렇게 하였다. 가령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의 영웅적 활약은 결과적으로 더욱 강력한 악당 조커를 고담시에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설정은 중동에서 악(테러리스트)을 없애고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시행한 미군(선)의 중동정책이 결과적으로 더 큰 악(알 카에다, 빈 라덴)불러 온 현실세계의 정치학과 유사하다. 물론 그 반대 시각(알카에다-선, 미국-악)에서의 비유도 가능하다. 사실 미국 쪽에선 최고의 악으로 보이는 빈 라덴이 일부 이슬람 민족 입장에선 배트맨 같은 최고의 영웅으로 비쳐지는 아이러니가 엄연히 존재하지지 않는가? 감독은 어느 편 입장에 명확히 줄을 서기 보단 현 시대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는 <뉴스위크>지와 한 인터뷰에서 ‘배트맨의 존재는 미군의 이라크 주둔처럼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배트맨은 세상을 바꿨지만 꼭 좋은 쪽으로만 바꾸진 않았다. 오늘 날 세계에서 바그다드는 혼돈의 위협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그런 상황이 미국도시에서 벌어진다고 상상하면 끔찍하지 않은가?’ 라고 말해 현실과의 연관성을 인정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배트맨의 집사 알프레드 역을 맡은 마이클 케인이 ‘슈퍼맨이 미국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라면, 배트맨은 미국을 제외한 세계에서 바라보는 미국’ 이라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배트맨은 악당들을 섬멸한다는 명분으로 회사의 자산을 사적으로 불법 활용하고, 일반인들의 휴대폰을 불법 도청한다. 그리고 법을 무시하며 추격전을 벌이면서 공공기물을 파괴하거나 때론 범죄자들을 법적 장치를 거치지 않고 체벌한다. 그런 모습은 최근 미국이 더 큰 악을 물리친다는 명분 아래 남의 나라를 무력 침공함으로서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행태와 유사하다. 관객 입장에선 엄청난 돈으로 편하게 호사를 누릴 수도 있는 사람이 자기 목숨과 재산을 걸고 범죄자들을 물리치려고 애쓰는 그에게 당연히 박수를 보내긴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정의가 이뤄지고 악은 섬멸될까? 극단적인 선을 행하려다 결과적으로 악인이 되고만 배트맨의 미묘한 운명이 이 영화의 주제를 심화시킨다.

② 구성 -5막 구성조커의 게임을 통해 증폭되는 위기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이전 작품들 대부분은 전통적인 서사구조 보다는 복합적인 구성방식을 선호했다. <미행>은 회상 방식으로, <메멘토>는 서사를 뒤집는 역순 구성 그 자체가 주요 모티프일 정도였고, <인썸니아>는 주인공의 의식에 수시로 끼어드는 플래쉬 백을 자주 사용하였고, <프레스티즈> 역시 회상방식에다 플래쉬 백 기법을 빈번히 활용한다. <배트맨 비긴스>도 첫 장면을 어린 시절에서 시작했다가 알고 보면 현실에서 성인이 된 부르스 웨인이 회상하는 플래쉬 백으로 밝혀지고, 스토리 전개과정에서 수시로 과거를 플래쉬 백으로 설명한다. 물론 그런 기법들은 <메멘토>를 제외하면 일반 영화에서 매우 흔히 사용하는 구성 방식이다. 하지만 몰입을 필요로 하는 영화에선 그런 식의 플래쉬 백은 너무 설명적이어서 자칫 관객을 감정을 끊고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스필버그나 히치 콕 감독이 자신들 영화에서 회상형식이나 플래쉬 백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걸 계산한 듯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선 플래쉬 백을 배제하고 철저히 서사적으로 풀어간다. 묵직한 주제를 가장 단순하고 전통적인 구성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한 현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대신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 비긴스>의 작가 데이비드 고야에 의하면, 전통적인 3막 구조 보다는 5막 구조를 따르고 있다고 하는 데, 그런 서사 구성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남다르다. 왜냐면, 도입, 발단, 전개, 위기/절정, 결말이라는 일반적인 극적 구성에서 대개 커다란 ‘위기/절정’는 후반에 한번 정도 오는 데 반해 <다크 나이트>는 영화 중반부터 큰 위기가 여러 번 반복 배치되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 작품의 주요 극적 갈등은 고담시라는 어둠의 세계를 장악한 조커 일당(마로니를 비롯한 여타 마피아 포함)과  고담시에서 그런 범죄 집단을 제거하려는 배트맨 측(경찰 고든, 검사 하비 덴트, 변호사 레이첼 포함)에 의해 이뤄진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극적인 힘은 대부분 조커가 주도하고, 배트맨 측은 그를 방어하기에 급급하지만 주로 실패한다. 그 전개 과정에서 주요 위기는 아래의 표1-1에서 보듯이 조커가 제시한 5개의 게임으로 이뤄진다. 대신 그 위기의 강도는 갈수록 증폭된다.


1-1. 본론(전개위기/절정결말)에 해당하는 조커의 게임            

  도입. 발단의 단계 40여 분간은 배트맨과 조커가 서로 부딪히거나 마주치는 장면은 없다. 단지 조커가 범죄조직을 자기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과정과 배트맨이 범죄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활약하는 모습을 각각 보여줄 뿐이다. 영화 시작 44분쯤 경과 되어서 조커가 방송을 통해 첫 경고 게임을 낼 때 배트맨은 처음으로 조커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고, 본격적인 조커와 배트맨의 대립이 시작 된다. 조커와 배트맨의 진검 승부는 이 영화의 전개, 위기/절정, 결말에 해당하는 주요 구성은 반복되는 게임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조커는 구성의 초반 사건 발단 지점에서부터 (표1-1에 나타난 게임 이전) 갱들 세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도 게임을 이용한다. 처음엔 갱들 모임이 쳐들어가 배트맨을 죽일테니 은행 돈 절반을 줄래, 아니면 계속 배트맨에게 당할래? 하고 제안했다가 무시당하자, 자기를 특히 비난한 갱 두목들을 사로잡아 서로 싸워 이긴 사람만 살려준다는 게임을 붙인다. 영화 전반에 배치는 게임은 일반 영화에선 한두 번 정도 배치되는 극적인 딜레마이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딜레마를 통해 긴장감을 유지한다.


③ 캐릭터-배트맨과 조커그리고 투 페이스

 <배트맨>에서 팀 버튼이 배트맨의 활약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프롤로그를 열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캐릭터를 소개하는 은행 강도 신으로 시작한다. 사실상 <배트맨>이 배트맨의 영웅담을 그린 영화라면, <다크 나이트>는 조커의 악행담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팀 버튼의 <배트맨>에 비해 <다크 나이트>가 영웅 배트맨의 내면의 갈등과 깊은 고뇌를 훨씬 심도 있게 묘사함으로써 캐릭터를 잘 살리긴 했지만, 조커 역시 그가 보인 구체적인 액션과 대사를 풍부하게 구체화함으로써 악당으로서의 매력과 카리스마를 훨씬 강화시켰던 것이다. 슈퍼히어로나 범죄 스릴러에선 일종의 중요한 규칙 같은 거지만, 역시 악당이 강하고 매력 있어야 그 장르가 힘이 있고 영화 전체가 사는 법이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보다 훨씬 강하고 똑똑하고 매력 있게 창조된 조커 덕에 역설적으로 영화의 긴장감이나 스릴이 배가되고 배트맨이나 여타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게 된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이끌어가는 사건은 철저히 조커가 주도하고 있다. 배트맨과 그의 협력자들은 조커가 벌여놓은 사건의 뒷북치기에 바쁘다. 사실상 대부분의 게임에선 배트맨이 지고 있다. 네 번째 게임인 보통 여객선과 죄수 수송선을 놓고 벌인 승부에서 유일하게 승리했으나 그것은 배트맨 덕분이 아니라 시민과 죄수들의 현명한 선택 덕분이다. 배트맨이 해낸 유일한 공적은 마지막에 조커를 사로잡고, 이어질 대형 참사를 막았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은 조커가 잡히기 전 쳐 둔 덫에 의해 살인자로 경찰에 쫒길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부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은 배트맨으로서, <메멘토>의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처럼, 자신이 영웅인가 악당인가 혼란을 느끼며 점점 더 존재론적인 위기에 사로잡힌다. 배트맨과 조커는 싸우면 싸울수록 그들을 구분 지었던 거리는 더욱 더 붕괴되어 간다. 조커가 배트맨에게 ‘널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네가 날 완성시키기 때문이야’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 둘(선과 악)은 마치 한 몸이었다가 떨어진 일란성 쌍둥이 같다. 배트맨은 이전에 당연한 초능력자로 행동했던 슈퍼 히어로 주인공들과 달리 자신의 약한 모습과 자책감, 그리고 복수 심리 등으로 인해 매우 인간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배트맨이 겪었던 남다른 유년시절의 고통 즉 부모의 죽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고통이 바로 그의 힘의 원천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된다. 조커라는 외부 적대자(Antagonist)와 더불어 존재하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주인공(protagonist)의 내적 갈등의 표현은 그 캐릭터를 더 심도 깊고 흥미롭게 만들었다.

배트맨은 DC코믹스의 영웅들 중 하나이다. 마블 코믹스와 디시 코믹스의 만화적 상상력의 영웅들은 대표적으로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엑스맨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들은 결국 슈퍼 히어로이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은 외계인이거나 초자연적인 힘을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되어 그 힘을 바탕으로 자신을 증명해나가는 반면에 이번 <배트맨 비긴즈>에서 드러난 배트맨의 정체는 그가 애초에는 ‘심리적인 고통’에 힘겨워 하던 인간이라는 점이다. 1990년대 <배트맨>시리즈에 등장한 배트맨에게는 거의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던 디테일들이다. 결과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은 초인 배트맨에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하여 진화된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다. 합법적인 시각에서 보면 배트맨이나 조커 둘 다 분명 무법자이고 악당일 수 있다. 실제로 배트맨은 조커를 비롯한 범죄자들을 잡으려는 과정에서 무고한 경찰이나 시민이 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조커와 추격전을 벌일 때는 배트카를 타고가면서 남의 차나 건물을 파괴하며 무자비하게 앞으로 달려간다. 결국 영웅과 악당의 기준이 모호해진 것에 대해 작가 조나단 놀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비 덴트의 영화 속 대사처럼 이 모든 것은 어느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있다. 그 시각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악당이 되기도 한다. 모든 캐릭터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선택의 근거와 행동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번 작품이 유난히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회색의 영역이 두터웠다는 점이었다.”
 

배트맨은 때로 답답할 정도로 몇몇 원칙을 중시한다. 즉 절대 악당들과 싸울 때, 총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격투 액션만으로 승부는 한다는 것과 죽이지도 않고 생포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조커를 여러 번 죽일 수 있었으면서도 결코 죽이지 못하고, 조커는 그런 그의 배트맨의 원칙을 역이용해 괴롭히곤 한다. ‘아직도 선을 믿는 사람이 많다’는 식의 고지식한 생각을 가진 정의의 사도이지만 그는 자신의 거대한 재력을 이용해 필요하면 불법까지 동원에 모든 세상의 악을 없애려고 애쓰는 일종의 편집증적인 슈퍼히어로란 점에서 남다르다. 

조커(히스 레저)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주인공 알렉스(말콤 멕도월)와 유사하게 무정부주의적인 캐릭터다. 실제로 이 캐릭터에서 부분적으로 벤치마킹 했다고도 한다. 조커는 일종의 혼란의 전도사다. 그는 어떤 대의명분도, 어떤 행동의 이유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배트맨에게는 매우 곤혹스러운 상대다. 작가 조나단 놀란에 의하면 그러기에 조커만큼 쓰기 쉬운 캐릭터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행동을 일일이 정당화할 필요도 없고 다른 캐릭터들 만들 때 늘 염두에 둬야할 감정의 기복 등을 따로 설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에 설명이나 정당화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매력이 반감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나중에 경찰이 조커를 잡아 조사했을 때, 그의 지문, 치아 샘플, DNA, 이름, 신분에 대한 어떤 것도 기록에 없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어떤 사람인가? 거기에 대해선 그저 미스테리로 남겨둔다. 그럼으로써 은유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조커의 때리고 죽이면서 느끼는 새디즘과 얻어맞고 피 흘리면서 즐기는 마조히스틱한 쾌락은 사드(Marquis de Sade) 못지않다. 그가 잡혀 배트맨에게 취조당할 때, 머리를 책상에 쥐어박자 ‘그러면 머리가 멍해져서 고통을 느낄 수 없으니 머리를 때리진 말라’고 항변한다. 얻어맞는 순간 그는 시종일관 낄낄거리며 웃는다. 

조커의 캐릭터가 기존의 악당들과 확실히 차별화 되는 장면은 그가 범죄 집단과 나누기로 한 돈더미를 불로 태워버릴 때다. 조커는 돈이 불에 타는 것을 말리려는 다른 마피아에게 말한다. “이 도시엔 좀 더 멋진 악당이 필요해. 내가 그렇게 될 거야. ... 돈이 중요한 게 아냐. 메시지가 필요하지. 모든 건 불에 탄다는” 그의 행동은 명백히 돈이나 세속적 욕망 보다는 <배트맨 비긴스>에서 고담시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병들고 타락했으니 다 불태워 버리자고 한 듀커드(리암 리슨)의 파괴 철학과 유사하다. 조커는 마치 <배트맨 비긴스>에서 배트맨과의 대결에서 죽은 듀커드가 보다 업 그레이드 되어 다시 태어난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흉터 있는 얼굴을 가리고 상대에게 공포심을 주기위해 항상 광대처럼 분장을 하고 다니고, 스스로 카드의 조커로 상징화하면서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반드시 ‘조커’ 카드를 미리 보내서 예고한다. 그는 악당이라도 쉽게 죽이지 않는다 배트맨의 원칙을 역이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커는 배트맨이 오토카를 타고 자신에게 정면으로 달려올 때 ‘그래, 날 죽여! 죽여 봐’하면서 뻣뻣하게 서서 정면으로 걸어가지만, 결국 배트맨은 그를 치지 못하고 비켜 가다가 넘어지고 만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거나 설명하지 않지만 그는 비상한 두뇌로 자기 밑으로 들어온 갱들을 이용해 사전에 철저히 모든 걸 기획하고 준비한 후, 배트맨이나 경찰력과 게임을 시작한다. 막판에 조커는 배트맨에게 잡히자 ‘광기는 가속도가 있어서 조금만 밀어줘도 속도가 빨라진다.’고 하면서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투 페이스 하비 덴트를 지목하고,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그에게 접근해 변화시킨다. 

하비 덴트/투 페이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과 조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 하비 덴트는 잠깐 들러리 정도로만 등장한다. 투 페이스와 관련한 캐릭터설정은 아예 없다. 조엘 슈마허의 3편 <배트맨 포에버>에 가서야 투 페이스(토미 리 존스)는 주요 악당 중 한명으로 등장할 뿐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하비 덴트 검사는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정의를 행하는 낮의 기사로서 어둠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밤의 기사 배트맨과 합동작전을 펼치며 쌍벽을 이루다가 조커가 벌인 게임의 희생물이 되어 연인 레이첼을 잃는다. 그때 그도 한쪽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 조커의 세뇌로 결국 투 페이스가 되어 '이 잔인한 세계에서 유일한 도덕은 운(chance)이야. 편견도 없고 공평하지.'라고 말하며 동전 던지기로 모든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하비의 원망은 조커도 배트맨도 아닌, 고든 서장에게로 맞춰지고 자신의 상황과 똑 같은 상황을 만들어 고든에게 복수하려한다. 그는 레이첼의 결혼 허락을 위해 양면이 같은 동전을 만들었지만 화상을 입는 순간 동전의 다른 면(불에 타 검어진)이 드러난다. 이후부터 그는 사람의 생명을 동전의 운명에 의해 정하고 아무런 흔들림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악인이 되어 최후를 맞는다.

배트맨의 진단처럼 그는 결국 조커가 ‘선한 사람도 타락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희생양 역할을 한다. 그래서 후반에 조커가 배트맨에게 붙잡힌 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하비 덴트와 배트맨의 대립 관계로 마무리한 이유가 될 것이다. 즉 하비 덴트는 나중에 조커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트맨이 선을, 조커가 악을 대변한다면, 하비 덴트는 선악을 동시에 대변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전반을 정의의 화신으로 행동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죽자 그 충격으로 악의 화신으로 행동하는 그의 캐릭터를 통해 ‘선과 악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니체의 철학을 입증한 것이다. 

위의 3인방 외에도 주요 인물은 배트맨, 하비 덴트와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변호사 레이첼, 그리고 나중에 서장이 되는 경찰 고든, 그리고 배트맨의 충복 알프레드와 폭스가 있다. 이들 인물들도 과거 배트맨 시리즈에 비해 잘 살아있는 캐릭터들이다. 이중에서 특히 고든 서장(게리 올드만)은 유일하게 그 가족 구성원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그는 주요 세 인물과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슈퍼맨 같은 능력은 없지만 법과 정의를 수호하며 평범한 가족들 지키려는 보통 시민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④ 인물의 갈등

<배트맨>에서 팀 버튼이 배트맨의 활약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프롤로그를 열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캐릭터를 소개하는 은행 강도 신으로 시작한다. 사실상 <배트맨>이 배트맨의 영웅담을 그린 영화라면, <다크 나이트>는 조커의 악행담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팀 버튼의 <배트맨>에 비해 <다크 나이트>가 영웅 배트맨의 내면의 갈등과 깊은 고뇌를 훨씬 심도 있게 묘사함으로써 캐릭터를 잘 살리긴 했지만, 조커 역시 그가 보인 구체적인 액션과 대사를 풍부하게 구체화함으로써 악당으로서의 매력과 카리스마를 훨씬 강화시켰던 것이다. 슈퍼히어로나 범죄 스릴러에선 일종의 중요한 규칙 같은 거지만, 역시 악당이 강하고 매력 있어야 그 장르가 힘이 있고 영화 전체가 사는 법이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보다 훨씬 강하고 똑똑하고 매력 있게 창조된 조커 덕에 역설적으로 영화의 긴장감이나 스릴이 배가되고 배트맨이나 여타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게 된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이끌어가는 사건은 철저히 조커가 주도하고 있다. 배트맨과 그의 협력자들은 조커가 벌여놓은 사건의 뒷북치기에 바쁘다. 사실상 대부분의 게임에선 배트맨이 지고 있다. 네 번째 게임인 여객선과 죄수 수송선을 놓고 벌인 승부에서 유일하게 승리했으나 그것은 배트맨 덕분이 아니라 시민과 죄수들의 현명한 선택 덕분이다. 배트맨이 해낸 유일한 공적은 마지막에 조커를 사로잡고, 이어질 대형 참사를 막았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은 조커가 잡히기 전에 쳐 둔 덫에 의해 계속 살인자로 경찰에 쫒길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부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은 배트맨으로서, <메멘토>의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처럼, 자신이 영웅인가 악당인가 혼란을 느끼며 점점 더 존재론적인 위기에 사로잡힌다. 배트맨과 조커는 싸우면 싸울수록 그들을 구분 지었던 거리는 더욱 더 붕괴되어 간다. 조커가 배트맨에게 ‘널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네가 날 완성시키기 때문이야’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 둘(선과 악)은 마치 한 몸이었다가 떨어진 일란성 쌍둥이 같다. 배트맨은 이전에 당연한 초능력자로 행동했던 슈퍼 히어로 주인공들과 달리 자신의 약한 모습과 자책감, 그리고 복수 심리 등으로 인해 매우 인간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배트맨이 겪었던 남다른 유년시절의 고통 즉 부모의 피살 현장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고통이 바로 그의 힘의 원천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된다. 조커라는 외부 적대자(Antagonist)와 더불어 존재하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주인공(protagonist)의 내적 갈등의 표현은 그 캐릭터를 더 심도 깊고 흥미롭게 만들었다

⑤ 모티프와 아이러니반전과 복선

끊임없이 이어지는 액션과 스릴 덕분에 숨 쉴 틈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전개되는 이 영화의 힘은 부분적으로 모티프나 아이러니, 복선 같은 극적인 요소들의 활용 덕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를 들자면, ‘가면 벗기기, 밝음과 어둠의 대비, 강박증, 게임, 돈’등이다. 일단 ‘가면 또는 가면 벗기기’는 이 영화 속에 주요 인물 셋 모두에게 관련된다. 배트맨은 낮에는 대부호의 바람둥이 부루스 웨인으로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배트맨 가면을 쓰고 정의의 사도로써 행세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한 인물이 상반된 행동을 하고 그 도구로 가면을 활용한 것이다. 조커 역시 광대 분장으로 가면을 대신한다. 어쨌든 그는 실제 모습은 미스테리로 남겨두고 가면 쓴 모습만으로 악을 상징화한다. 둘은 서로 상대방의 가면 벗기기에 집중한다. 조커는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을 죽인다고 협박하고, 배트맨은 그런 조커를 잡으려고 애쓴다. 하비 덴트는 검사로서 합법적인 정의의 수호자로 활약하다가 자신의 애인이 죽은 뒤로 얼굴 한쪽이 흉측하게 화상을 입고 마치 괴물 형상의 가면을 쓴 것처럼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가치관도 변해 정의의 수호자에서 단지 동전에 의해 운명을 결정해 사람을 죽이는 냉혹한 인물도 변한다. ‘강박증’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이다. 배트맨은 정의에 대한 강박증으로 인해 불법도 마다않는 모순을 보이며 혼란에 빠진다. 조커 역시 반대 입장에서 선에 대한 반감으로 철저히 혼란을 추구하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대한 집착과 강박증으로 과정 자체는 무시하곤 한다. ‘게임’역시 중요하다. 구성에서 언급했지만, <다크 나이트>의 중요한 액션과 스릴은 대부분 조커가 내건 계속되는 게임으로 인해 발생한다. 하비 덴트의 동전 던지기 역시 게임의 일종이다. 흑백 같은 칼라영화인 이 작품의 이미지 역시 중요한 모티프일 것이다. 밝음과 어둠은 선과 악을 비유하고, 배트맨과 조커의 캐릭터를 대변한다. 특히 돈이라는 모티프는 이 작품에서 히치 콕의 <사이코>처럼 관객을 사건으로 유인하는 일종의 매커핀이다. 조커는 처음에 은행에서 돈을 털고, 경찰과 배트맨은 돈을 단서 삼아 악당들을 잡으려 하지만, 그건 결국 조커와 본격적인 결투를 위해 배치된 매커핀일 뿐이다. 결국엔 아무도 돈에 관심 없고, 조커와 승부 게임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중요 모티프들은 동시에 아이러니기도 하다. 배트맨, 조커, 하비 덴트의 이중성은 캐릭터의 아이러니다. 낮에는 재벌 날라리 밤엔 정의의 수호자인 브루스 웨인, 악행을 거침없이 행하면서도 얼굴은 항상 웃는 모습인 조커, 투 페이스가 되어 한쪽은 정의의 대변자 다른 한쪽은 괴물 같은 악당인 하비 덴트, 그들은 한 캐릭터에서 상반된 두 가지를 드러낸다. <배트맨 비긴스>에서 설명되고 있지만 부르스 웨인은 어린 시절 박쥐(Bat)에 대한 공포로 인해 불행을 겪게 되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박쥐 가면을 쓰고 악당들에게 자신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공포를 느끼게 한다. 즉 공포의 대상을 역이용함으로써 그 공포를 극복한다는 것은 행위의 아이러니에 속한다. 브루스 웨인이 나름대로 고담시를 타락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정의의 사도를 표방하고 많은 재산을 투자해 배트맨 활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조커라는 극단적인 악당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설정도 영화의 핵심 아이러니에 속한다.

이 영화에서 대반전은 없다. 하지만 에피소드식의 반전은 초반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프롤로그에서 조커와 갱 일당이 은행을 털 때, 동료인 줄 알았던 그들이 한 사람씩 상대를 죽이는 방식으로 유도해서 결국엔 조커 혼자 남게 된 작은 반전에서부터, 조커 일당의 공격으로 죽은 줄 알았던 고든 반장이 나중에 살아서 배트맨을 극적으로 구하는 것, 그리고 조커가 자신을 비난한 흑인 갱들에게 트로이 목마처럼 시체로 위장에 들어갔다가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일어나 역공하는 것도 작은 반전의 실례다. 그 외에도 조커의 협박으로 인해 죄수선과 일반 여객선 사이에 서로 먼저 터뜨린 배가 살아남는 게임에서 결국은 시민이나 죄수들 스스로의 현명한 판단 덕에 살아남게 되는 것도 의미 있는 반전이고, 배트맨이 최종적인 영웅으로 멋지게 끝나리라 기대했는데, 스스로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쫓기는 장면에서 마무리 되는 것도 멋진 반전이다. 물론 영화 중반에 배트맨이 조커의 협박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는 순간 하비 덴트가 자기가 배트맨이라고 거짓 자수를 하는 것도 배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반전 설정이다. 그런 식의 반전의 배치는 영화 요소요소에 적절히 배치되어 극적인 재미를 부여한다.

  복선은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다 있기 마련이지만, 자칫하면 설명적이 될 수 있기에 대작 액션 스릴러 영화에선 사실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놀란은 너무 설명적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개연성을 위한 사전 복선 설정이 철저하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치밀함 덕분에 다소 황당한 경우가 많았던 기존의 슈퍼히어로에 비해 실감나고 정서적인 공감을 훨씬 일으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배트맨 비긴스>는 사실상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 캐릭터의 설득력과 고담시에 배트맨이 활약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조커가 등장할 것에 대한 복선 같은 영화다. 팀 버튼의 <배트맨>을 비롯한 과거 시리즈에서는 그런 디테일한 복선이나 개연성을 위한 설정은 많지 않다. 배트맨의 과거는 잠시 말로서 설명될 뿐이다. <다크 나이트> 프롤로그에서 갱들이 범죄를 준비하면서 나눈 간단한 잡담을 통해 조커가 왜 얼굴에 분장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은행 강도를 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남은 동료를 죽이고 은행 직원의 입에 수류탄을 물리고 안전핀을 배서 폭발시켜 죽이는 장면을 통해 앞으로 조커가 어떤 악당으로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복선이 갈고 있다. 예전 블록버스터 영화 같으면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은 반전을 위한 복선도 신중히 깔고 있다. 영화 초반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브루스 웨인과 동행한 러시아 발레리나가 하비 덴트를 보며 ‘혹시 당신이 배트맨 아니냐’며 그의 얼굴의 절반을 가리며 농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장면 덕분에 하비 덴트가 나중에 ‘내가 배트맨이다’고 할 때 뜬금없는 반전이 아닌, 설득력 있는 반전으로 와 닿게 된다. 치밀하고 자연스런 복선은 똑같은 상황이라도 나중에 오는 반전이나 극적인 상황을 훨씬 설득력 있게 만든다.(12-3에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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