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8일 차에 찾아온 신생아 황달
"아이가 너무 노래요."
나는 몰랐다. 산후조리원에서 매일 찾아오는 모자동실 시간은 설레면서도 무서웠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했지만 배냇저고리를 풀어헤쳐보거나 몸 구석구석을 만져볼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혼자서 배냇저고리를 다시 입힐 자신도 없었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만지다간 내가 아이를 다치게 할 것만 같았다. 물론 이런 조심성은 집에 돌아와 아이와 단둘이 밤을 보낸 며칠 새 사라졌지만, 생후 열흘도 되지 않은 아이는 예쁘고 귀해서 쳐다보기만 해도 배실배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한편 손 대면 깨질까 봐 겁나는 아주 얇은 와인잔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아이의 몸이 노랗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신생아실 선생님께서 아이가 노란 것 같으니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며 직접 소아과 진료 예약까지 잡아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의 이상 증상도 알지 못한 채 멀뚱멀뚱 아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소아과 방문을 위해 겉싸개로 감싼 아이를 받아 들 때는 살짝 설레기도 했다. 이때까지도 아이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내게는 아이와의 첫 외출이었다.
"보호자는 밖에서 대기해주세요."
아이를 안고 검사실로 향했다. 겉싸개에 폭 싸인 아이는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황달 검사를 위해서는 발뒤꿈치에서 채혈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검사실에 아이를 안고 들어가니 전해 듣는 이야기보다 살벌한 바늘과 각종 처치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검사를 위한 채혈은 당연하고 쉬운 이야기로 들리지만 내 아이를 바늘로 찔러 일부러 피를 낸다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바늘에 눈이 고정되어있던 몇 초 뒤, 보호자는 밖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검사실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겉싸개에 싸인 아이를 품에서 건네고 검사실을 나왔다. 몸은 문 밖으로 나왔지만 마음은 아직도 검사실의 그 바늘에 꽂혀 나오지 못했다. 곧 문 안쪽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시간 같이 보내며 들었던 배고픔, 졸림의 울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병원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생각지도 않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무것도 못하고 발만 동동거리는 나 자신이 답답하고 짜증 났다. 잠시 뒤 검사실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속도가 슬로모션을 건 듯 더디게 느껴져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두 손으로 문을 밀고 몸을 던지듯 들어갔다. 아이는 겉싸개를 푼 적도 없었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본 그 모습대로 검사실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아직 눈물샘도 발달하지 않아 건조한 눈가였지만 쌔액-쌔액- 평소보다 큰 숨을 몰아쉬는 아이를 보며 느꼈다.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는구나. 피부를 맞댄 지 열흘도 되지 않은 이 아이를 내가 빨리도 사랑하게 되었구나. 나를 둘러싼 내 우주와 내 세상이 이 아이로 인한 빅뱅을 맞이했다.
"입원해야겠네요"
황달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보통 간이 안 좋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피부와 눈 흰자위가 노랗게 변하면 황달이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달이 내 아이에게 해당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사실 나는 황달뿐만이 아니라 아이가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을 이때껏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십 여분만에 나온 검사 결과는 아이의 황달을 알렸고, 진료실에서 처음 본 아이의 전신은 내가 기대하던 뽀얀 아기 천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아직 황달이 내려오지 않은 분홍빛 발바닥과는 달리 상반신은 어두운 노란빛을 띠었고, 손으로 살짝 눌렀다 떼면 그 주변이 탁한 노란색으로 변한 것이 확연히 보였다. 우리 아이는 바로 입원해야 했고 통상적인 치료 기간은 2박 3일이 될 것이라 안내받았다.
아이를 받아 드는데 어찌할 수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간호사 선생님은 이 맘 때쯤 신생아들이 황달을 많이 겪는다며 2박 3일만 지나면 금방 좋아질 것이라 나를 달래주셨다. 수납을 하며 안내받은 대로 광선치료 중 아이의 눈을 가려줄 안대를 사서 입원실로 향했다. 입원실에는 두 명의 아이가 더 누워있었다.
아이가 입원했다.
입원실 간호사 선생님은 눈이 시뻘게진 나를 보며 치료는 아주 간단하다며 설명해주셨다. 광선치료는 특수한 광선이 나오는 침대에 아기가 맨살을 대고 누워있기만 하면 되는 치료였다. 대신 수치 확인을 위해 아까 검사실에서의 그 채혈을 매일 해야 한다고. 아까 보았던 그 바늘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서 3일 내내 아이를 찔러 피를 내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우울했다. 산후조리원에 돌아와 아이가 입원했음을 알렸다. 우울했다. 아이를 자주 보기 위해 산후조리원에서도 신생아실에 가장 가까운 방으로 배정받은 터였다. 우울했다. 아이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데 우리 아이는 여기에 없었다. 우울했다. 신생아들은 황달을 자주 겪는다면서 여기 누워있는 저 많은 아이들은 건강한데 우리 아이만 입원했다. 우울했다.
산후조리원 방문을 닫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가족들에게 메시지로 아이가 입원했음을 알리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마지막으로 베개를 끌어안고 울었던 때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서른셋, 정말 오랜만에 목놓아 울었다. 산후조리원 선생님이 곧 찾아와 눈물범벅이 된 나를 보며 이럴 줄 알고 오셨다 했다. 모유가 부족해서일까, 모유가 잘못되었던 건 아닐까 자책하는 내게 '엄마가 아이에게 모유를 주는 게 어떻게 잘못된 일일 수 있냐'며 위로해주셨다. 번갈아가며 가족들의 전화가 왔다. 받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설명하며 되새기고 싶지 않았고, 이 모든 게 내 잘못 같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엄마의 아이다.
특히 엄마의 전화는 받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울 것이 뻔했다. 그러면서도 엄마와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손수건 하나를 움켜잡고 핸드폰을 들었다.
"엄마"
이럴 줄 알았지만 엄마를 부르는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엄마는 울먹이다 이야기하다 다시 또 울기를 반복하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이의 상태와 내 상황을 다 듣고 난 엄마는 걱정했다.
"방에 혼자 있어서 어떡하니"
엄마는 엄마의 아이를 걱정했다. 서른 중반의 나이로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의 아이였다. 입원한 아이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아이를 입원시키고 혼자 있을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삼십여 년 전 엄마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유년시절 유난히 잔병치레가 잦았다. 자주 아팠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징징대는 나를 안고 전전긍긍했을 어린 엄마의 애끓는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엄마가 지금의 나를 달래주듯 그때의 엄마를 안아주고 싶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문장의 진실함
입원실은 하루 세 번 15분 면회가 가능했다. 아이를 안아보거나 만져볼 수는 없고 유리창 너머로 커튼이 열리면 잠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치료 중 안대로 얼굴을 반 정도 가린 상태였다. 그래도 면회 시간마다 찾아갔다. 눈을 가리고 누워있는 아이라도 알 것 같았다. 바로 옆의 신생아실로 엄마, 아빠들이 찾아와 각자의 아기를 부르고 예쁘다 사진 찍고 있으면 우리 엄마는 언제 오는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아기를 창문 너머로 보며 끊임없이 기도했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어른들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른들이 바라는 다른 것도 많으면서 괜히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 말이 세상 그 어떤 문장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무엇보다 절절한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2박 3일 후 퇴원했다. 앞으로는 잘 먹고 잘 싸면 된다는 말에 아이가 먹기만 해도 기쁘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도 기뻤다. 아이가 건강해지면서 다른 기도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나보다 운동신경이 좋았으면,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있었으면, 어학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늘 첫 번째 기도는 ‘건강하고 바른 아이’로 자라길 빈다. 우리 아이의 첫 번째 병치레가 지나간다.
아이가 퇴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