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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ki Lee Feb 13. 2022

유칼립투스를 보내다

옥상 정원 이야기

다락방에는 말린 절화(折花)만 진열해 놓은 작은 테이블이 있다. 천일홍, 라벤더, 수국, 장미 등 정원에서 얻은 꽃을 잘 말려서 예쁜 화병에 정리해 둔 것이다. 꽃 보기 힘든 겨울에 제법 화사함을 느끼고 위안도 받을 수 있다. 테이블 옆에는 1.5미터 크기의 죽은 유칼립투스가 박제처럼 생전의 모습으로 서 있다. 은색 양철 화분에 흙 대신 스티로폼으로 채우고 죽은 나무를 그대로 심어 놓았다. 회녹색 잎이 탈색되어 베이지색으로 변했지만, 수형(樹型)과 잎 모양이 그대로라 언뜻 보면 살아있는 나무로 착각하기도 한다. 

 

죽어서 다락방의 박제로 남은 유칼립투스 

그런 유칼립투스를 보내주기로 했다. 다섯 달 남짓 다락방에 있었지만, 절화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퇴색하고, 남아있던 수분도 없어져 작은 충격에도 잎이 바스러진다. 그때쯤 보내주는 것이 절화의 존엄을 조금이나마 지켜주는 것이다. 유칼립투스를 옥상으로 꺼낸다. 전지가위로 작은 가지와 잎은 자른 후 톱으로 잘게 해체하기 시작한다.   

   

우리 집에는 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키우던 어항의 물고기가 죽던 날 엄마의 부고를 들었다. 신혼 때 어항의 물고기가 죽던 날 또 여동생의 죽음을 전해 들어야 했다. 우리 집에서 살아있는 동물을 키우는 것은 금기가 되었다. 그 후 만만한 식물 키우기에 관심이 갔고, 열 평 남짓한 옥상정원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온 이후, 꽃과 나무를 키우는데 취미를 두고 있다. 반려견이나 반려묘에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애정을 준 꽃나무가 죽게 되면 역시 마음이 아프다. 유칼립투스 잔해를 쓰레기 봉지에 담는다.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아린다.  


유칼립투스는 이 년 전 봄에 우리 집에 왔다. 아내가 플라스틱 포트에 심어진 빈약한 묘목을 사 왔을 때 ‘저걸 왜 샀지?’ 하는 마음이 컸었다. 작은 정원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이 없었다. 율마처럼 예쁜 수형이나 초록의 산뜻함도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왜 그렇게 빨리 크는지 얼마 되지 않아 옥상 한 공간을 차지했다. 아내는 유칼립투스를 좋아했다. 수시로 물을 주고 전지하여 수형을 다듬어 나갔다. 가을이 되니 제법 나무 모양이 나왔다. 월동을 위해 겨우내 베란다에서 지낸 유칼립투스는 해가 바뀌고 가을이 되자, 더 눈길이 가는 멋진 나무로 성장했다. 엄지보다 굵은 외대로 크다가, 위쪽에는 가지와 잎이 애드벌룬처럼 풍성해졌다.      


거실 창가 화분대는 우리 집에서 가장 예쁜 꽃이나 나무만 올 수 있다. 대표선수들이다. 거실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있어 좋다. 작년 가을, 찬바람이  불자, 유칼립투스는 승진해서 거실 창가를 차지했다. 베란다나 비닐하우스 월동이 제격이지만 순전히 예뻤기 때문이다. 유칼립투스 옆에 앉아 책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엷은 향기가 치료 효과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가지 하나가 시들시들하더니만 곧 나무 전체가 생기를 잃고 말았다. 바쁜 와중에 거실 화분 물 주기를 몇 번 잊었는데 말라죽은 것이다.


작은 묘목을 애정을 듬뿍 줘서 볼만한 나무로 키웠는데 졸지에 말라 죽고 나니 아내의 상심이 컸다. 죽은 나무를 바로 버리려 했지만, 너무 매정한 것 같았다. 결국 마른나무로 조금만 더 보기로 하고 화분에 심어 다락방에 두게 되었다. 테이블 옆에 배치하니 다락방의 레트로 감성과 제법 잘 어울렸다.  

   

유칼립투스는 아열대 기후가 원산지다. 다락방의 것은 ‘구니’ 품종으로 동글동글한 잎이 매력적이어서 관상용으로 많이 재배된다. 유칼립투스는 초원에서 최대 70m까지 큰다고 한다. 거기에 코알라 몇 마리가 매달려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는 풍경이 녀석의 본모습이다. 우리 집 것은 호주의 너른 숲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생소한 나라에서 관상목으로 태어난 원죄를 품고 있다. 옥상에서는 커 봤자 전지 되어, 줄곧 난쟁이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율마도 두 해를 넘게 함께했지만, 며칠 전 죽어 버렸다. 옥상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월동시켰는데, 영하 10℃ 아래의 강추위가 여러 날 계속되자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보낸 옥상 식물들이 여럿이다. 녀석들의 잘못은 아니다. 환경에 적당하지 않은 식물을 집에서 보겠다는 나의 욕심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저 예쁘고 특이한 식물을 키우는 데 관심이 있었지 ‘녀석들이 엄마나 힘들어할까?’까지는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삼월이 되면 화분 분갈이하고, 거름을 주고, 정원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내 욕심이 아니라 식물의 입장에서 수종을 정해야겠다는 마음이다. 힘들지 않게 겨울을 날 수 있는 나무, 척박한 옥상 환경에 적합한 들꽃 위주로 고를 것이다. 유칼립투스를 보낸 서운한 마음이 새 친구들로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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