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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ki Lee Feb 16. 2022

눈송이의 죽음

눈오는 겨울, 옥상 테라스에서 본 또 다른 이별


정오가 가까워지자 눈발이 제법 짙어진다. 바람도 세게 불고 있다. 하늘을 쳐다본다.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잿빛 공간이다. 잿빛 하늘과 내리는 눈이 구별되지 않는다. 눈송이는 머리 위 높지 않은 곳에서 팝콘 터지듯 생겨나 일제히 떨어지고 있다. 도솔산 쪽으로 시선을 낮춘다. 암녹색 숲을 배경으로 무정형으로 내리는 눈발이 눈에 들어온다. 풍향의 변화에 따라 눈송이들이 떼 지어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몰려다닌다. 바람이 더 휘몰아치자, 방향성을 상실한 눈송이들이 각자도생으로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눈송이는 원래 물이었다. 자작나무 숲에 면한 맑은 호수였던 친구도 있고, 초원을 흐르며 양 떼의 목을 축여 주던 녀석도 있다. 햇볕이 따스했던 어느 오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구름이 되었다. 하늘에서의 꽃 같은 삶은 길지 않았다. 매서운 북서풍에 떠밀려 원치 않는 긴 여행을 떠나야 했다. 낯선 고장에 도착한 그들은 지쳐 낯빛마저 회색으로 어두워졌다. 잠시 후 눈송이가 되어서 짧은 생을 마쳐야 한다.  



정오. 영상의 날씨로 눈은 쌓이지 않고 바로 녹는다. 정원 탁자에는 이미 녹은 눈으로 흥건하다. 눈 녹은 물 위로 또 다른 눈송이들이 떨어진다. 함박눈과 싸락눈이 섞여 있다. 제비갈매기처럼 수직으로 낙하하는 눈송이도 있고, 떨어지기 싫어 이리저리 몸부림치는 녀석도 있다. 중력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모두 떨어진다. 물속으로 떨어진 눈송이는 잠깐 형태를 유지하다가 곧 먼저 녹은 물에 흡수된다. 녹지 않으려고 버둥거려보지만 정해진 운명은 거역할 수 없다. 눈송이는 녹아 물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 처남의 전화를 받았다. 요양병원에 계신 장모님이 위독하여 중환자실로 옮긴다고 했다. 세 번째 중환자실 입원이었다. 더 위독해질 경우 연명치료를 할 것인지 의견을 묻는 전화였다. 사람의 생명을 두고 논의하는 것 같아 마음이 뜨끔했다. 누가 생명을 연장하는 또 멈추는 권한을 우리에게 주었을까.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깨끗하게 생을 마감하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장모님이 치매에 걸리신 지 벌써 십삼 년이 지났다. 거동이 힘들어진 오 년 전에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한다. 수저로 떠먹여 드려야만 한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힘든 상태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효심이 남다른 처남이 매일 방문하여 수발을 들었다. 코로나 19로 가족의 출입이 금지된 지금, 장모님은 간병인에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요양병원에서 만난 노인들의 눈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장모님을 뵈러 갈 때마다 병실의 노인들은 수시로 바뀌었다. 누구는 언제 돌아가셨고, 또 누구는 중환자실로 옮겼다고 처남은 세세히 알려준다. 요양병원이 ‘죽음 대기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늦은 오후. 기온이 떨어져 영하에 접근한다. 바람도 거세다. 드문드문 내리던 눈발이 다시 세졌다. 눈송이는 거의 수평으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정원 탁자에는 그래도 눈송이가 떨어진다. 눈송이 녹는 속도는 현저하게 느려졌다. 밑부터 물에 녹기 시작하면, 눈송이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이내 넘어진다. 그리고는 힘겹게, 천천히 물과 동화된다. 물이 고여 있지 않은 탁자의 볼록한 부분에는 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쌓인 눈과 녹은 물 사이의 경계에는 생사를 다투는 공방전이 치열하다. 생존한 눈송이들도 내일 아침, 햇살에 의해 죽음이 집행될 예정이다. 

     

눈송이들이 녹은 물은 주검의 또 다른 형태다. 수천, 수만의 눈송이들이 죽어 탁자 위의 물이 되었다. 어떤 눈송이는 빠른 죽음을 맞이했고 다른 눈송이는 고통과 함께 더 천천히 죽음을 겪었다. 요양병원의 환자들처럼 죽음이 얼마간 유예된 녀석도 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장모님을 떠올리면서 어떤 죽음이 현명한 것인가 생각에 잠긴다. 가족들은 장모님을 연명 치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신의 아들, 딸들을 가끔은 알아보시는데 냉정한 선택이 어려웠을 것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젊은 장모님이라면 어떤 판단을 하셨을까 궁금하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집에서 맞는 임종이 당연했다. 치료를 받다가도 마지막이라 판단되면 집으로 모시고 왔다.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더 많은 의료 혜택을 받게 된다. 모든 생명이 나가는 일은 고귀하다. 죽는 장소와 죽음의 성격에 관계없이 그 과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거기에 인간의 윤리와 의학기술이 너무 깊게 개입하는 것은 싫다. 백 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곡기를 끊은 스콧 니어링과 같이 자발적인 죽음도 원치 않는다. 때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떠나고 싶을 뿐이다. 가족들에게는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라고 기회 있는 대로 말하고 있다. 나중에 아들, 딸이 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죄의식 없이 나를 보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밤이 깊어지자 온도는 더 떨어진다. 어느새 눈은 그쳤고 바람도 잔잔하다, 다락방에서 본 옥상은 캄캄하다. 정원의 등을 켠다. 탁자뿐 아니라 옥상 바닥까지 엷게 눈으로 덮여있다. 불빛에 쌓인 눈이 반짝거린다. 잠시 유예된 죽음의 그림자 때문인지 그 모습은 낮보다 더 차갑고 처연하다. 밤하늘에는 별이 몇 개 반짝이고 있다. 눈송이들의 마지막 밤이 고통보다는 별과 두런두런 하늘의 추억을 나누는 짧은 행복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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