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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ki Lee Mar 13. 2022

쑥 캄파뉴

빵에서 화합하는 세계를 보다

오븐 문을 여니 향긋한 빵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빵을 꺼낸다.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쓴 두 덩어리의 빵. 투박하지만 칼집 모양에 따라 잘 부푼 모습이 먹음직하다.


어젯밤에 빵 반죽을 만들어 냉장고에 두었다. 아침에 일어나 오븐 온도를 올린 다음, 잘 부푼 빵 반죽을 넣고 구운 것이다. 도마 위에 빵을 올려놓고 귀퉁이를 조금 잘라 입에 넣는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돈다. 커피와 함께 빵을 아침 식탁에 올린다.

빵을 좋아한다. 아침 식사로 밥 대신 빵을 먹은 지 꽤 오래되었다. 내가 선택한 재료로 몸에 좋은 빵을 직접 만들고 싶어서 퇴직 후 구청 문화센터의 제빵 강좌에 등록했다. 2년 넘게 내가 만든 빵을 먹고 있다. 아직 질리지 않으니 귀촌해도 빵 걱정은 없을 듯하다.


오늘 빵은 다국적이다. '쑥 캄파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프랑스 밀가루, 러시아 호밀, 미국산 이스트가 주재료다. 거기에 미국 크랜베리, 스페인 올리브유, 태국산 원당 그리고 국내에서 만든 쑥 가루를 추가했다. 소금과 물을 더해 중국산 반죽기에 넣고 빵 반죽을 만들었다. 오븐은 삼성전자 제품인데 베트남 공장에서 만들었다. 여러 나라의 재료와 기술이 모여 오늘 식탁의 빵이 되었다.


자기 결정성이 강한 성격이라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재료의 양을 바꿔가며 빵을 만들었다. 먹지 못하고 버린 빵이 많았다. 건강을 위한다고 호밀을 과하게 넣으면 잘 부풀지 않았다. 설탕이나 크랜베리가 많아지면 담백하지 않아 쉽게 질렸다. 쑥을 너무 많이 넣어 쓴맛이 난다고 아내의 타박을 듣기도 했다. 빵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조화란 것을 깨달았다. 재료의 조화가 깨지면 제대로 된 빵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특정한 나라의 재료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프랑스 밀가루를 쓰든, 호주산 밀가루를 쓰든 빵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빵 반죽은 고온의 오븐에서 열 세례를 받았다. 그 시련 속에서 재료들은 자기주장을 버리고 끈끈하게 결합했다. 고체였던 이스트는 물을 만나 기체로 변해 반죽을 부풀게 했다. 소금도 이스트의 발효를 도왔고, 빵의 풍미를 끌어올렸다. 쑥은 자칫 잃을 수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깨우쳐 주었다. 화학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아름다운 결합이어서 화합으로 보였다.


조화를 강조하지만, 개성을 잃지도 않았다. 새로운 재료와 문화를 만나면 다른 맛으로 꽃 피웠다. 오븐에 구운 바게트나 캄파뉴도 맛있지만, 탄두리 화덕에 구운 난의 고소한 맛도 일품이다. 옥수수 반죽을 팬에서 구운 토르티야는 중남미의 대표 음식이 되었다. 포르투갈의 빵이 동양 문화를 만나 달콤한 카스텔라나 단팥빵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새해부터 세계가 시끄럽다. 중국이 대만을 위협하더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에 맞서 미국과 EU는 목청을 돋우고 있다. 강자의 틈바구니에 낀 한국은 눈치만 본다.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부 이해되는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배경은 큰 나라의 과한 욕심이다. 나라마다 자기 역사를 윤색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옛 영화를 재현하라고 가르친다. 죄 없는 사람들을 수십만 명이나 살육한 자를 영웅으로 추앙한다. 많이 가졌음에도 더 넓은 영토와 부를 쫓는다. 일부 정치가와 권력에 편승한 학자들은 이 싸움을 부추긴다. 화합의 장이어야 할 올림픽까지 일부 국가의 욕심으로 그 정신이 흐릿해졌다. 빵과 같은 조화로운 세계를 보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일까.


남의 눈 속의 티끌을 지적할 처지는 아니다. 내 삶도 그에 못지않았다. 내 것이 아님에도 가지려고 애썼고, 결국 남의 가슴에 큰 생채기를 낸 적도 있었다. 욕심을 줄이라고 하면서 남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로 생각했다. 조화보다는 욕심을 택했고 비례해서 마음이 황폐해졌다. 느지막하게 취미로 배운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깜냥도 안되면서 허명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렸다. ‘글을 쓰며 행복을 얻겠다’라는 초심도 시나브로 사라져 버렸다.



빵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화합의 결과라고 생각하니 오늘따라 맛이 더 좋다. 크랜베리의 달콤함을 느끼고, 올리브유의 촉촉함도 즐긴다. 지리산 자락에서 생산했다는 우리 밀을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국내산 재료로 빵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다. 무안 양파도 넣고, 영암 무화과나 대관령 감자도 넣어 봐야겠다. 그것들의 조화가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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