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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ki Lee May 04. 2022

미스킴 라일락

오월 초, 테라스를 빛내는 누나 같은 꽃

다락방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가자 미스킴 라일락의 향기가 기습한다.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고 가만히 다가간다. 뾰족한 꽃망울이 터지면서 태어난 아기 손톱만 한 작은 별, 초록 호수에 분홍별을 흩뿌려 놓은 것 같다. 장미의 농염함이나 풍로초의 단아함은 없다. 하지만 소박하면서도 화사하다. 스쳐 가는 바람에 무심하게 진한 향기를 낸다.    


  

미스킴 라일락은 육 년 전 초봄에 우리 집에 왔다. 출장길에 과천 화훼시장에 들렀었다. 한 무더기의 미스킴 라일락이 농원 구석에 쌓여 있었다. 정원이나 묘목장이 없어지면서 그곳의 나무를 모두 캐 온 것 같았다. 줄기가 제법 굵었지만, 흙도 없이 앙상한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묘목이라기보다는 폐목에 가까웠다. ‘저걸 심으면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농원 주인은 한 그루에 오천 원만 내고 가져가라 했다. 다른 묘목을 사는 김에 덤으로 두 그루를 얻어 화분에 심어 놓았다.   

  

녀석들의 생명력은 놀라웠다. 거의 포기하는 마음으로 심어 놓았는데도, 날씨가 따뜻해지자 가지 끝마다 팥죽색의 꽃눈을 냈다. 이듬해, 퇴비를 넉넉하게 주고 분갈이해주니 씩씩한 꽃나무로 성장했다. 비좁은 화분에서도 잔병치레하지 않았다, 시든 듯해도 물만 주면 금방 정신을 차렸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마저 이겨냈다.


원래는 우리나라의 꽃나무였다. 해방 후 미 군정청의 식물 채집가가 북한산의 수수꽃다리를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한 품종이다. 자료 정리를 도왔던 타이피스트의 성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란다. 수수꽃다리보다 수세도 강하고 꽃도 많다. 향기마저 진하다. 화사해져 돌아온 녀석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누이를 먼 곳으로 시집보낸 서운함과 성공해 돌아온 누이를 다시 보는 반가움이 교차한다. 미스킴 라일락을 보면 어린 시절 동네 누나들이 떠오른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산촌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동네 누나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서울로 일하러 갔다. 명절 때 선물 꾸러미를 들고 돌아온 누나들은 너나없이 뽀얗고 예뻤다. 까무잡잡한 또래 계집애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서울 물이 좋아서 그렇다 했다. 어린 마음에 누나들이 가져다준 학용품이나 새 옷이 좋았다.    

  

철이 들어서야 그 뽀얀 얼굴이 햇빛도 보지 못하고 온종일 공장에서 일한 결과임을 알았다. 때로는 공순이라 불리며 천대받았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밭뙈기도 사 늘리고 남자 형제들의 학비를 댔다. 내내 고생하다 아끼던 화장품을 바르고 집에 들른 누나들은 다들 천사였다. 


으뜸으로 예뻤던 큰누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로 일하러 갔다. 분홍치마 나풀대는 소녀 같은 새봄이 찾아오면, 누나가 보고 싶어 괜히 마음이 새초롬해졌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 누나는 집에 들어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장을 담그고 똑 부러지게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십 대 초반의 꿈 많은 아가씨의 삶을 가족을 위해 포기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한 막내 동생은 누나의 자랑이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산 코트를 입혀주며 엄마처럼 대견해했다.


누나의 삶은 결혼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트럭에 꽃과 나무를 싣고 아파트 단지를 돌며 팔았고, 환갑이 넘어서도 식당에서 일했다. 간간이 누나의 아픔이 들려왔다. 늘 환한 얼굴로 나를 대했지만, 숨겨진 고단함이 설핏 배어 나왔다. 누나를 생각하면 마음 한쪽에 큰 돌이 박힌 듯 먹먹해진다.  



   

며칠 전 꽃을 시샘하는 돌풍이 밤새 옥상을 덮쳤다. 새벽에 나와 보니 처참했다. 미스킴 라일락은 화분 째 넘어져 있었다. 본래 뿌리가 튼실하지 않은 녀석들은 제 깜냥보다 많은 가지와 잎을 가졌다. 거센 바람을 버틸 수 없었다. 다가가 보았다. 다행히 잎과 꽃은 상하지 않았다. 화분이 넘어져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어린잎과 꽃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쓰러지는 것을 택하였을까. 애틋한 마음으로 녀석들을 바로 세워 주었다. 

    

“라일락이 예쁜데 이번 주말에는 꼭 놀러 와”

“글쎄, 다른데 일자리가 곧 날 것 같아. 다음에 갈게. 건강은 괜찮지?”

코로나 19로 집에 들어앉은 누나와 통화했지만, 자기 몸은 챙기지 않으면서 여전히 병약했던 동생의 걱정만 한다. 이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데, 누나에게 나는 여전히 철부지 막낸가보다. 

    



얼마 뒤면 미스킴 라일락의 꽃도 사그라질 것이다. 꽃이 지면 눈길도 받지 못하고 정원 구석에서 녹색 이파리만 무성하게 내겠다. 겨울에 앙상한 몸으로 추위를 맞아도 또 이겨낼 것이다. 좋은 때에 다시 꽃을 피우고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내겠다.    

  

누나가 이제는 좀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누나의 삶만 즐기면 안 될까. 가끔은 미스킴 라일락처럼 꽃과 향기를 뽐내며 당당히 서길 바란다. 꽃이 좋은 오늘, 누나가 유난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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