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보드라운 비단 레이스를 품었다. 코랄 핑크의 속살이 겉으로 나갈수록 미색으로 연해진다. 그윽한 향기는 꽃에 기품을 더해 준다. 볼륨이 풍성한 한복을 입은 귀부인을 보는 듯하다.
보름 전부터 줄기마다 촛불 모양의 봉오리를 주렁주렁 맺고 있었다. 며칠간 집을 비운 사이 오월을 질투하는 비바람이 거셌다. 봉오리가 상할까 봐 내심 걱정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옥상 정원의 톨비악은 꽃을 씩씩하게 피우고 있었다.
옥상 장원에 로즈 데 톨비악(독일 장미 품종)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작년 벚꽃 필 무렵, 정원 펜스에 톨비악 장미 한그루를 심었다. 이십오 층 옥상이라 구멍 숭숭 뚫린 펜스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리가 쩌릿쩌릿했다. 덩굴장미를 걸쳐 놓으면 안정감을 줄 것 같았다.
장미축제에서 본 톨비악이 떠올랐다. 여러 겹의 꽃잎이 풍성하고 색감이 남달라 눈길이 갔었다. 게다가 사계 장미라고 하니 가을까지 꽃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한 것으로 주문해서 화분에 심어 놓았다.
한 달쯤 지나니 무성해진 잎 사이로 봉오리가 몇 개 보였다. 어린 나무라 그런지 축제에서 보던 것보다는 작고 빈약했다. 꽃이 풍성한 장미 덩굴을 기대했지만, 가뭇없이 두 송이만 피워냈다. 실망이었다.
여름이나 가을에 또 피기를 기대하며 개화에 도움이 된다는 영양제를 물에 타 주었다. 거기까지였다. 톨비악은 작년 내내 잎만 무성하다간 잎을 떨구고는 겨울잠에 들어갔다.
녀석의 몸에 달린 이름표가 눈에 띄었다, ‘로즈 데 톨비악, 사계성 장미’. 사계 장미가 아니고 사계성 장미란 말인가? 기분 좋으면 사계절 꽃을 내고, 맘에 들지 않으면 피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같았다.
까다로운 녀석이다. 생긴 것도 좀 못됐다. 새순은 녹색이 아니라 자주색으로 약간 섬뜩하다. 상어 지느러미같이 생긴 가시는 크고 많아서 위협적이다. 찔리면 따끔한 정도가 아니고 머리털이 설 정도로 아프다. 실체를 알게 된 후, 톨비악에서 마음이 서서히 멀어졌다.
독일계 장미인 안젤라. 왕성한 수세가 장난이 아니다
새 봄에 덩굴장미를 한 그루 더 사 왔다. ‘안젤라’다. 역시 축제에서 눈여겨보았던 품종이다. 톨비악이 준 배신감을 상쇄시켜줄 것 같았다. 다른 펜스에 심어 놓았다. 장미는 겨울이 지나면 바로 전지해 주어야 한다. 톨비악도 큰 줄기만 남기고 잔가지는 잘라주었다. 뿌리가 나무 화분 밖으로 삐죽 나온 것이 보였다. 화분이 너무 작은 것 같았다. 큰 화분에 퇴비를 듬뿍 넣고 분갈이해 주었다.
그러면서 몇 마디 던졌다. ‘너, 올해도 제대로 꽃을 안 피우면 퇴출이다.’ ‘안젤라를 심어 놓았으니 알아서 해.’ 녀석에게 새로운 경쟁상대가 왔음을 통지하고 꽃을 많이 맺으라고 겁박했다. 순간 마음에 찔렸다.
안젤라는 이길수 없는 경쟁자인가 보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면서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이 경쟁이었다. 힘을 합하여 좋은 결과를 내면 좋으련만, 언제부터인지 경쟁이 점차 회사 시스템으로 들어왔다. 년 초가 되면 사업소별, 팀별, 개인별로 목표를 부여받았다. 주기적으로 성과를 확인하고 미흡하면 질책받았다.
만회 대책을 세우고 뛰어야 했다. 그 목표라는 것이 회사가 잘되는 방향이 아니라 낙하산으로 내려온 사장의 생색내기 위한 것도 많았다. 일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별도의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못해도 남이 더 못하면 상대적으로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사업소나 부서에 안 좋은 일이 터지면 속으로 좋아한 적도 있었다. 평가 결과가 나오면 상여금뿐 아니라 승진에도 영향을 주었다. 경쟁이 덜한 공기업인데도 체질상 이런 경쟁이 싫었다.
그러면서도 아래 직원들에게 은근히 경쟁을 유도한 적이 많았다. 성과가 미흡한 직원들을 닦달하고 때로는 다른 부서로 보내기도 했다. 이런 일을 잘하면 유능한 관리자로 대접받았다. 나도 모르게 내 생활에도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가 깊게 스며든 것 같다.
작년 사월 초에 심었으니 꽃을 피우기까지는 겨우 한 달, 뿌리가 자리 잡기도 부족한 기간이었다. 꽃을 많이 피우지는 못했지만, 톨비악은 작년 내내 뿌리와 줄기를 키우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썼을 것이다. 그 힘으로 추운 겨울을 났는데, 야박한 주인은 경쟁자를 데려다 놓고 모지락스럽게 대한 것이다. 톨비악에게 미안했다. 분갈이하면서 장미에 좋다는 인가리 비료를 뿌려 주었다.
일찍 심어서 그런지 안젤라는 기대한 대로 정원에 첫 장미를 선물했다. 막 피어나는 발랄한 소녀 같았다. 세 겹의 단출한 꽃잎이지만, 여리여리한 핫 핑크 꽃이 펜스 위로 하늘거리는 모습은 볼만했다. 가지마다 무수히 달린 꽃봉오리는 오월 내내 눈의 즐거움을 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톨비악에 눈길이 갔다. 녀석은 묵묵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미가 피기 시작한 오월의 옥상 정원
그런 톨비악이 마침내 여러 송이의 꽃을 당당하게 피워낸 것이다. 기특하다. 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꽃을 피운 것이다. 그간 정원을 가꾸면서 미美라는 어정쩡한 기준에만 맞춰 수종을 선정하고 비교하고 평가했던 것 같다. 초보 정원사의 욕심이었다.
이제는 꽃나무들이 커가면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열어야겠다. 겨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사월의 된바람에 새순이 얼마나 아팠는지, 한낮의 햇살에 얼마나 목말랐는지,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그들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더 마음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우리 집 정원만이라도 경쟁보다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편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