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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ki Lee May 24. 2022

옥살리스와 국화는 너무해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 옥상 테라스


예전에는 한 지붕 두 가족이 많았다. 방이 세 개쯤 되면 두 개는 가족이 쓰고 문간방은 세를 줘 살림에 보탰다. 세입자는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주인집 자식과 또래의 아이들이 있다면 더 신경이 쓰였다. 크게 떠들다가는 시끄럽다고 구박받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쫓기기도 했다.


세입자 보호제도가 미흡했던 시절이라 쥐 죽은 듯 지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요즘은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한 집 살림을 원하지 않는다. 육아에 도움을 받더라도 근처에 따로 집을 구한다. 이래저래 한 지붕 두 가족은 보기 어렵다.     

유칼립투스 화분에 자리 잡은 국화


옥상 정원에도 한 지붕 두 가족이 많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삼월 초가 되면 화분 분갈이하며 흙을 돌려쓰게 된다. 여러 화분의 흙을 큰 통에 쏟아붓고 퇴비를 섞은 다음 다시 화분에 넣는다. 작년 백일홍 화분의 흙이 올해는 장미 화분에 넣어질 수 있다.


떨어진 씨앗이 움트는 오월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새순이 올라온다. 잡초도 섞여 있지만, 대부분 작년 정원에서 보던 꽃들이다. 심을 의도가 없던 것들이라 화분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세입자일 뿐이다.  


가장 왕성한 세입자는 국화다. 옥상 데크의 좁은 틈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국화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싹을 틔운다. 여러 화분에 쑥같이 생긴 새순이 돋는다. 장미 화분에도, 라벤더 화분에도 백합 화분에도. 좀 얌전히 있으면 좋으련만 국화들은 눈치가 없다. 어느 날 새순이 올라왔는가 싶은데, 며칠 눈을 다른 데 두면 어느새 주인과 해보기 경쟁을 하고 있다.

옥살리스는 올리브나무 아래에 둥지를 틀었다

 

쑥쑥 크는 만큼 화분의 영양분도 많이 차지한다. 막 봉오리를 맺은 장미를 격려하기 위해 듬뿍 뿌려 놓은 퇴비도, 개화에 도움이 된다는 영양제도 다 가로챈다. 가을에 보기 위해 따로 키우는 국화도 있지만, 이런 세입자 국화에는 특단의 조처를 내려야 한다.


하트 모양의 이파리 때문에 사랑초라 불리는 옥살리스도 눈치 없는 세입자 중 하나다. 작년에 옥살리스 화분을 하나 얻어왔었다. 존재조차 잊어버렸는데, 얼마 전 뜬금없이 올리브나무 화분에 순을 냈다. 뽑아 버리려다 그냥 두었는데 화분을 전세 낸 듯 난리굿이다.


올리브 이파리가 누렇게 뜬 것이 다 옥살리스 때문인 것 같다. 보라색 꽃이 예쁜 이소토마도 몇몇 화분에 순을 냈다. 꽃기린 화분의 이소토마는 까치집에 비둘기 앉은 듯 아예 주인 행세다.   

  

이것들은 세력이 강한 마가렛이나 네모필라 화분에는 보이지 않고, 빈틈을 보이는 화분만 공략한다. 그래도  마음이 가는 세입자는 채송화다. 여러 화분에 여리게 순을 냈다. 자세히 보아야 채송화임을 알 수 있다.


시골의 담벼락 아래나 마당 한쪽에서 수줍게 꽃을 피우는 것들인데, 정원에서도 숨죽이며 눈치를 보고 있다. 주인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보면 세입자 본분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세력이 강한 네모필라, 마가렛, 풍로초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덩치가 작았던 나도 늘 위축되어 살았던 것 같다. 사내다운 호연지기나 당당함도 없었다. 세상에 세입자로 빌붙어 사는 느낌이었다. 군대 같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 고졸로 입사한 직장에서의 대졸자와의 경쟁, 박사들이 넘쳐나는 연구원에서의 성과 달성. 거친 세상에서 나의 생존 방식은 채송화 같이 튀지 않으면서 묵묵히 내 일을 하는 것이었다.     


청매화 붓꽃 화분에는 국화와 옥살리스가 주인행세다

작년 캐나다에서 암매장된 원주민 어린이들의 유해가 일 천여 구 이상 발견되었다. 서부 개척이라는 미명 아래 백인들은 총銃과 균菌으로 인디언들을 학살했다. 남은 자들마저 동화시키기 위해 어린이들을 강제로 기숙학교에 수용했는데, 학대 등으로 수천 명의 어린이가 희생된 것이다.   


욕심에 눈먼 백인들은 일만 년 이상 터 잡고 살고 있던 원래 주인을 끔찍하게 청소하고 땅을 차지했다. 그 후손들이 지금 다른 나라의 인권을 지적하고, 문화 다양성을 논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자연을 존중하고 침입자들과 공존하고자 했던 인디언들이 남긴 시와 같은 어록과 대비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세입자다. 백 년간의 임대차 계약을 맺고 지구라는 커다란 화분에 뿌려진 씨앗이다. 변함없이 서 있는 산, 수백만 년을 유장하게 흐르는 강, 모든 것을 받아 주는 바다가 주인이다. 주인을 위협하고, 다른 세입자에 상처를 주는 우리가 국화가 아닐까.   


채송화는 보이는 대로 캐서 따로 플랜트박스에 심는다

천방지축으로 나대던 국화는 모두 뽑혔다. 너그러운 아내 덕분에 버려지지 않고, 지인 농장에 심어졌다. 옥살리스는 순전히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몇 포기만 살아남아서 빈 화분을 차지했다. 채송화는 모두 캐서 작은 화분에 심어 놓았다.

   

화분에서 여러 꽃이 다투는 옥상의 좁은 공간이 아쉽다. 너른 꽃밭에 국화, 옥살리스, 채송화가 다른 꽃들과 어우러진 평화로운 정원을 갖고 싶다. 구석에 아그배나무 한그루가 서 있어 그들을 지켜보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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