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은 나에게 다가와 질문을 한다.
"왜 그래?"
"지금 기분이 안좋아. 슬퍼."
그럼 이따금 듣게 되는 질문이 이것이었다.
"무슨 일 있어?"
나는 참 이 질문이 왜 나오는지 이해가 안됐다.
"아니, 아무일 없어."
"그럼 왜 슬퍼?"
나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닫아버렸다. 적어도 그들의 말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1.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겨야 슬픔을 느낀다. 2. 즉 아무 일이 없으면 좋은 기분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아무 일이 없으면 평소에 좋은 기분이라니. 왜 무슨 일이 있어야만 기분이 나빠지다니. 나는 그냥 오늘 일어나기만 해도 기분이 안좋은데! 사람들을 만나도 우울하고 지루하고 무기력하고 죽고 싶기만 했는데. 아무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는데. 당장이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만 들었는데.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지옥같은 기분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기분이 안좋으면 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나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머릿속의 호르몬이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에는 기분을 좋게 해주는 호르몬이 분비가 되는데 나는 아예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께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슬프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됐다. 한참 이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언제 어느때쯤 밀어닥치는지도 가늠할 수 없이 무방비하게 공격당했다. 나는 이 감정에서 도망쳐 나오는 수단으로 폭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우울하고 슬프고 부정적인 감정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이 쓰나미는 예보가 없다. 언제 어디서 몰려올지 모르고, 어느 정도의 양으로 오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무방비하게, 아무 대책 없이 쓰나미가 몰려오면 몰여오는대로 휩쓸려야 했다.
쉽게 말하자면, 난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감정을 통제할 수 없고 널뛰기하는 이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불에 탄 너무 장작을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뜨겁고 놀라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당장 불을 꺼버려야지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기 시작할 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이거였다. "폭식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나요?"
아무 생각이 없는 거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찰나의 순간에 어떤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 의사선생님의 말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아무 생각이 없이 우울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우울해지는 상황을 느리게 재생을 하면, 보인다. 내가 우울해지기 직전에 했던 생각이.
영어동아리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다. 한 남자애가 소개팅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우울해졌다. 난 그 남자애랑 친하지도 않았는데 소개팅 받는다는 사실에 우울했다. 순간 내가 그 남자애를 좋아하는건가 했지만 천천히 내가 했던 생각을 되짚어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 남자애가 소개팅을 했고, 만약에 내가 이상형이었다면 나를 좋아할 수도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을 했고, 결정적으로 "아, 역시 난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해." 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왠 처음 보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이성적 호감을 보여도 나는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졌다. "저 남자가 저 여자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유는 내가 호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야." 실제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데다가 연결성이 약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쉽게 하는 비논리적인 사고 패턴이다.
현대 심리학은 감정은 어떤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전제한다. 나도 그에 동감하는 바이다. 어떤 상황, 그 상황 속에서 드는 내 생각,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감정. "나 우울해" 이 짧은 단어에 사실은 많은 인지와 사고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는 친구가 "기분이 우울해" 라고 말하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사실 아무 이유 없이 우울한 것은 없다. 그 안에는 자기 대화 과정이 포함 되어있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잘 아는 방법은 그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다. 사실 우울한 상태에서 글을 쓰기란 힘들다. 특히 내 경험으로 나는 감정의 소욜돌이 안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를 못한다. 글을 쓰지 못한다. 감정에 휩싸여서 당혹스럽기 때문이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애썼다. 최대한 감정을 이야기 하고 감정을 쓰려고 노력한다.
쓰는 것이 힘들다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려면 이 감정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한번은 생각해봐야한다. 논리적인 사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감정이 우울함이었나? 무기력이었나? 어디어디에서 오는 무기력인가? 슬픔인가? 그렇게 내가 했던 생각을 차근차근 돌아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무슨 생각 떄문에 우울했는지 그 범인을 잡아냈다면 이제는 그 범인을 취조해야할 때다. 정말로 그 생각이 합리적인 생각인지. 타당한 생각인지. 옳은 생각인지. 증거가 있는지 물어봐야한다. 대부분 그렇게 취조하게 들면 그 범인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논리성이 없기 때문이다. 들이밀 증거도 없다. 결국 범인 철창에 갖히고 더 이상 그 생각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혹여나 오늘도 아무 이유없이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면, 찬찬히 얘기해보거나 글로 써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