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솔 Nov 09. 2021

우울증 일기 25. 10만자를 쓰는 방법


10만자를 쓰는 방법 


웹소설 공모전을 준비했다. 응모 조건은 10만자 이상. 대충 A4 70페이지 되는 분량이었다. 그정도 분량의 글은 처음 써보는건 아니지만 아직 나에겐 힘든 일이었다. 아이디어 한 줄 쓰는 건 재밌는데, 이게 이야기가 되고 긴 분량의 글로 풀어나가야 할 때면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뭘 써야할지 생각이 안났다. 글쓰는 사람에게서 제일 무서운 게 빈 종이가 아닐까 싶다. 


나는 30일 정도를 생각하고 공모전을 준비했다. 10만자를 한번에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나눠서 하기로 했다. 하루에 5천자 정도 쓰려고 노력했다. 계산상으로는 20일 동안 5천자를 쓰고, 10일 정도 퇴고 하는 시간을 들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10만자를 쓰려면 까마득하고 멀어보이고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5천자는 할만했다. 하루에 5천자 정도 쓰면 시간이 남아도 더 쓰지 않았다. 그냥 다른 일을 했다. 


처음에는 언제 도착할 수 있을까 했던 70페이지에 어느덧 도달했다. 


나는 늘 불안에 떨어왔다. 이루고 싶은 목표와 꿈이 있어도 이것이 이루어질까? 할 수 있을까? 걱정과 불안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니 당연히 글쓰는 것도 하기 싫었다. 글쓰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고등학교 공부도 그랬다. 불안과 걱정으로 교과서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한숨만 쉬고 시간을 보냈다. 공부하면 될 시간에 드라마를 보거나 딴 짓을 했다. 하지만 즐기지 못했다. 회피하려고 한 거 였으니깐. 불안에서 멀어지고자 먹기 시작했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불을 켜놓고서 잠이 들지 못해 선잠을 자기 일쑤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대학생 시절에는 생활 패턴은 더 엉망이었다. 잠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 밥먹는 시간 아무것도 규칙적인 게 없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 모르겠고 나는 일주일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으며 하루하루가 무의미해져갔다. 그러자 영겁의 굴레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잠도, 식사도 규칙적이지 못한 삶. 일상 따위는 없는 삶... 일상을 저주하는 나. 그게 내가 우울증을 겪는 동안 삶의 모습이었다. 


우울증에서 벗어난다는 건 규칙을 다시 세우는 일 같다. 규칙을 세우고 이를 지킨다는 건 삶의 주도권을 내가 되찾는 일과 같다. 각종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고 부딪히던 배. 그 배의 조종대를 다시 잡는 것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을 정하고, 어디를 갈건지 정하고, 무슨일을 할건지 정하고, 무엇을 먹을지 정하고, 얼마큼 먹을지 정하고, 언제 휴식할지 정하고 무엇을 하고 놀건지 정하고 그걸 반복하는 일.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시간표에서 이제는 안정감을 느낀다. 


이게 내 삶이구나! 


 출근하고 회사에서 일하고 남는 시간에 글쓰고, 대본보고 시나리오보고. 집에 와서 인강들으면서 이것저것 공부하고 주말에 사람들 만나러 가는 것. 


이게 내 삶이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런 삶도 괜찮다고 느꼈다.




 

작가의 이전글 우울증 일기 24. 불안을 앓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