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의 소설 속에는 늘 '그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언제나 우주선에서 내리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동안 우주를 떠돌아다닌다. 어쩌다 정착한 별은 '멸망'의 별이거나,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가 사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립된다.
김초엽은 소설 [방금 떠나온 세계]를 통해 사회의 단면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보통'이 되지 못하는 존재들은 작가가 만든 상상의 세계에서 불안전하고 이방인 같은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다. 그리고 '보통'에 속하는 '우리'들은 불편하고 어색하고 거부감이 든다. 소설 속 배경은 상상력의 세계이다. 상상력으로 창조된 세계는 우주선을 타고 다른 별로 갈 수 있는 세계, 기계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세계, 말이 아닌 입자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생성하는 세계, 인류 최초의 모습은 기억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상상력의 세계를 현실적인 세계로 바꿔버린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상상력의 세계는 환상적이면서도 때론 공포스럽기도 하다. A.I가 생활 곳곳에 들어오게 된 요즘 상상의 세계가 그리 이질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상의 세계는 만들어진 공간이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생각의 꼬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확장되는 세계, 곧 우주와 같은 세계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우주의 끝을 보지 못했다. 겨우 지구에서 조금 떨어진 세계를 발견했을 뿐이다. 김초엽은 이 끝이 없는 우주의 공간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둡고 보이지 않는 광할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상상을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그러나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이 공간이 익숙하다. 어디선가 있을 것 같은 사람들, 무심히 봤던 현상들이다.
김초엽은 작품 속에서 '보통'이 되지 못한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무난한 삶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비현실적이고 공상에 불과한 이 존재들은 마치 지금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한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불편해 한다.
1. 우주의 세계, 끝도 없이 확장되는 공간 그리고 딜레마
총 7편의 단편이 실린 이 작품은 가상 현실을 배경으로 삼는다. 모든 SF 소설들이 그러하듯, 이 소설 역시 우주라는 배경을 깔아 놓고 시작한다. 우주라는 공간은 광할한 공간이다. 우주는 끝도 없이 확장된다. 그래서 목적지가 없다. '출발'이라는 단어에는 반드시 '도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주는 '출발'만 있을 뿐, '도착'은 없다. 그래서 길을 찾을 수가 없다. 한 번 길을 잃어버리면 우주 속에 갇혀 버린다. 그래서 광할하고 넓지만 오히려 고립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소설 속 공간은 고립된 공간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립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완전한 고립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곳을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의 설정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작품 속 공간은 닫혀 있지만 열려 있다. 반대로 열려 있지만 닫혀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성격 때문에 인물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공간을 벗어나려고 하기도 하고 공간에서 계속 갇혀있으려 하기도 한다. 때론 다시 돌아오기 위해 부단히 그리워하기도 한다.
라이오니는 동료와 함께 '멸망'의 별에서 떠나는 것을 거부한다. 노아 역시 별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에 남기로 한다. 반대로 조안은 단희의 충분한 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을 떠나려고 한다. 모두 떠나거나 또는 남거나 한다. 그것은 소설의 문장처럼 "이곳을 사랑 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것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고립된 공간은 '우주'와 같은 물리적인 공간말고도 존재한다. 모그인 마리는 시지각 이상증으로, 로라는 몸 정체성 통합 장애로, 조안은 단희와 전혀 다른 언어 체계로 인해 같은 공간에 살지만 고립되어 있다. 이는 소통의 단절에 의한 고립이다. 마리는 시각의 구조나 체계가 일반사람들과 다르다. 마리는 플루이드로 인식한다. 플루이드는 모그들을 위한 장치다. 시지각 이상증으로 인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 이 장치는 마리를 고립시킨다. 조안은 숨그림자와 소통하기 위해 통역기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이 통역기는 조안을 더욱 외롭게 만들 뿐이다.
고립은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단절을 피하기 위해 만든 다양한 표현과 언어 체계는 오히려 '그들'을 고립시킨다. 단순히 단절이 아니라 아예 끊어버리게 된다. 공간의 고립은 '너'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다. '너'와 '나'는 언제든지 선을 넘을 수 있지만 넘지 않는다. '너'와 '나'는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불쾌감이다.
2. 번역하기 위한 언어. 단지 '너'는 들어올 수 없는 세계
[숨그림자]에서 단희는 조안을 위해 새로운 의미합성 기계를 만든다. 단희는 조안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지만, 사실은 조안이 숨그림자 속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이다. 조안과 단희는 통역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조안은 원형 인간으로 숨그림자 사람들이 잃어버린 인간의 언어를 구사한다. 지구가 파괴되기 전 사용하던 언어는 사라졌고 숨그림자 사람들은 입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그들의 언어는 오로지 쉽고 효육적인 의사 전달의 목적에 있다. 조안은 숨그림자의 의사소통을 따라가지 못한다. 단희는 조안이 숨그림자 속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기를 바랐고 그래서 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도록 기계를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조안은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고 조안의 언어를 충분히 들을 수 있게 되었음에도 숨그림자 사람들은 조안을 구성원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숨그림자 사람들에겐 조안은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리는 시지각 이상증을 가지고 태어났다. '모그'라고 부르는 이 존재들은 보이는 것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어 일반사람과 같이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 마리에게 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들 중에 하나다. 춤을 기계적으로 인식을 할 수 있어도, 디테일하게 들어가지 못한다. 일반 사람이었다면 재능이라 할 수 있는 능력이 마리에게는 불필요한 능력이 되어 버린다.
로라는 몸 정체성 통합 장애를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는 팔이 하나 더 있다는 인지한다. 그래서 걷다가도 넘어지고 물건을 들고 있다가도 떨어트린다. 이러한 로라의 장애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진'도 그에게 메일을 보낸 사람도 불안해한다. 과연 우리가 로라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고립은 분류로부터 시작된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 어른과 아이 등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나눈 분류다. 신체적인 모습으로 나눈 단순한 분류지만, 이 분류로 인해 인간은 고립된다. 그어 놓은 선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 공간은 언제나 열려 있다. 막혀있지만 문은 잠겨있지 않다. 그러나 아무도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분류에서 벗어나는 순간 또 다른 사람은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조건을 만든다. 분류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기. 적어도 '보통'에 근접하지 못한 이들은 '소수'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기. 그리고 '소수' 안에서만 소통할 수 있게 해 버리기이다.
[최후의 라이오니]에서 '나'는 불완전한 로몬이다. 그래서 '나'는 어린 로몬들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어린이라는 것은 어른이 비해 불완전하다. 그러니 불완전한 로몬인 '나'는 정상적인 범주에 들지 못한다. 그래서 남들처럼 단독으로 탐사를 가지도 못한다. '나'가 처음으로 단독 탐사를 가게 된 별도 '멸망'의 별, 위험하지만 연구할 가치가 없는 별이다.
불완전한 존재, 어딘가 이상한 존재, 분명 '우리'와 비슷한데 어딘가 부족하거나 다르게 생긴 존재, 소외시키면 안 되지만 우리가 같이 살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존재 때문에 인간은 이 존재를 특정짓는다. 표면상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 '우리'가 덜 불편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우리'는 모그라는 단어로, 몸 정체성 통합 장애라는 단어로, 원형 인간이라는 단어로 '그들'을 묶어 버린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유독 가슴이 아픈 이유는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다른 우리는 소통이 되지 않고, 서로의 모습이 불쾌하고 그래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싫은데,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답을 내린다. 그것은 언어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숨그림자]에서 숨그림자 사람들은 말이 아닌 공중에 떠 다니는 입체들로 소통한다. 이들의 언어 방식은 단순히 효과적인 의사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공중에 떠 다니는 입체들은 그대로 남아 다른 사람이 뒤늦게 합류해도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때론 입체는 기록이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조안의 언어는 기괴하다. 우선 소리를 잃어버린 그들에게 조안의 말소리는 불쾌하다. 반대로 조안에게 그들의 언어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무심코 던진 입체들은 조안에게 신경성 독으로 퍼지기도 한다.
숨그림자 사람들의 말이 조안에게는 독이 된다는 설정은 이 작품을 통과하는 중요한 설정이다. 조안과 숨그림자 사람들은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숨그림자가 무심코 내뱉은 조안에 대한 불편한 언어들은 조안을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조안의 언어들은 숨그림자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그냥 달라서 불편할 뿐이다.
단희가 하려는 의미합성 기계는 결국 조안과 숨그림자들이 서로 소통하게 하려는 것 즉 조안을 숨그림자 사람들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게 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기계 역시 조안의 언어를 인정하기보다 조안이 숨그림자 사람들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조안은 새로운 방식으로 단희에게 들어간다. 그것은 소리도 말도 언어도 아닌 냄새이다. 조안은 냄새라는 새로운 방법을 단희가 이해하기 쉽게 숨그림자 언어로 표현한다. 단희는 조안의 새로운 감각에 익숙하지 않지만 싫지는 않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 조안의 방법이었다.
후에 단희가 만든 기계가 숨그림자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숨그림자 사람들 사이에서 아프거나 늙어서 더이상 입채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결국 단희는 단희만의 방법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하도록 만든다.
노아가 벨라타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오브 때문이다. 오브가 만들어내는 유독 물질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살기 위해서는 벨라타를 떠나거나 오브를 먹는 방법 밖에 없지만 벨라타 사람들은 오브를 먹지 않는다. 벨라타의 원래 주인은 오브들이였다. 노아가 벨라타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오브가 오로지 인간을 위해 스스로 잠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너'와 '나'의 공간은 다른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 조안도 로라도 노아도 모두 같다. 우린 같은 공간에 사는데 왜 고립이 되어야 할까? 충분히 나갈 수 있음에도 왜 나가지 못하는 걸까? 작가는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같은 공간에 살지만 서로 영역이 다른 '나'와 '너'.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상상의 세계가 익숙해 보이고 있을 것만 같은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