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사랑을 몰랐다면, 인간의 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을 지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로 인지한다. 예측할 수 없고 끊임없는 독창성으로 인해 분류될 수 없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롤랑바르트는 그의 책 [사랑의 단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이다. 나는 그를 분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러 온 유일한, 독특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대상은 나의 욕망에 기적적으로 달려온 독특한 존재이자, 유일한 이미지를 가진다. 그래서 사랑은 독창적이다. 사랑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분류할 수도 없다. 공통된 집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정확하게 정답을 내릴 수도 없다. 사랑에 대한 이미지는 아름답게 표현되기도 하고 때론 거칠게 표현되기도 한다.
[헤어질 결심]은 바로 거친 사랑의 단면을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의 사랑은 예측할 수 없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와서 허락도 없이 눌러앉는다. 손톱으로 긁어도 떨어지지 않고, 불로 태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온 거리를 헤매어도 사랑은 진저리 날 정도로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해준에게 사랑은 갑자기 찾아왔거 서래의 사랑은 아무리 노력해도 떠나지 않는 그런 사랑이었던 것이다.
1.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안개같은 언어들.
우선,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글은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 글은 각본집 [헤어질 결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언급하는 것은 영상이 아닌 언어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쓰여진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적어 놓은 의미 있어 보이지만 의미가 없어져버린 언어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영화도 적용 가능하다. 말이란 결국 언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이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라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눈 앞에 얇은 안개가 넓게 퍼진다. 안개가 가득 차 있어서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면 객관적인 시선은 없어지고 오로지 그 사람만 보이게 된다. [헤어질 결심]에는 언어들이 해준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언어들은 해준의 귀를 통과하기도 하고 바늘이 되어 눈을 콕콕 찌르면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해준은 듣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옆에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해준에게는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되어버린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 쓸모 없고 의미 없는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의미 없어 보이는 것도 소설 속에서 의미 없는 역할을 하기 위한 장치일 뿐, 정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헤어질 결심]에서도 문장들이 있다. 그러나 문장들은 작품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의미가 있어보이지만 의미가 없는 그런 문장들이다.
수완
예쁜 건 인정하시는 거네요?
(한숨 쉬는 해준)
역차별이라고요. … 여자 아니고 외국인 아니고
그냥 남자 한국인이었으면
팀장님, 가서 밤새 잠복하자고 하셨을 걸요?
정안
이포로 전근 오면 안돼? 나 매일 이런거 먹게.
내 옆자리 이 주임 말이야, 샘이 많다는.
정안
당신은 살인도 있고 폭력도 있어야 행복하잖아.
[헤어질 결심] 중에서
작품 [헤어질 결심]에서는 의미가 있어보이는 대사들이 나온다. 수완의 대사는 그의 성격을 설명하는 대사일 수 있다. 술에 취해 서래의 집에 찾아가는 행동이나 범인에게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수완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수완은 행동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고 행동 역시 거칠다. 하지만 단순히 수완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수완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선 다른 말을 사용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주인공 서래는 예쁘다. 그리고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 이 설정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쁜 여자와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서래는 약자가 된다. 문제는 수완의 대사이다. 수완의 대사를 통해 해준은 범인을 잡기 위해 밤새도록 잠복하는 흔히 말하는 열정적인 형사임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대사를 사용했을까?
정안의 대사도 의미심장한 말들이 많다. 우선 정안은 이 주임을 거론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언뜻 보면 이 주임은 정안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설명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정안과 이 주임은 너무나 가까워보인다. 해준에게 자라를 구해주는 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이 주임에게 부탁한다.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 보인다.
정안의 대사는 일하면서 겪었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안은 이 주임이란 인물을 통해 해준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나를 좀 봐 줘.
그래서 당신은 살인도 있고 폭력이 있어야 산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굉장히 상징적인 이 대사가 왜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사랑에 빠지면 안개가 가득 낀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서래와 해준에게 집중이 되는 순간 정안의 대사나 수완의 대사가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굉장히 의미 있는 이 대사들이 해준에게는 의미 없는 단어들로 변해버린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누가 봐도 서래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해준은 외면한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서래의 상황과도 연결이 된다.
수완
팀장님은 어떤 생각부터 드는데요?
해준
불쌍하다는 생각
[헤어질 결심] 중에서
서래는 중국에서 왔고 한국말이 서툴다. 어찌보면 약자에 해당된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상황에서 서래는 당연히 용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랑에 빠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불쌍하다는 생각, 해준은 서래를 보고 불쌍하다고 한다. 후에 연수가 서래가 불쌍하지 않냐고 왜 그렇게 서래를 의심하냐고 물어볼 때 해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의미 있는 대사들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흘러간다. 관객들이 대사를 곱씹어 볼 시간도 주지 않는다. 시선은 오로지 서래와 해준에게 집중되어 말들은 주변으로 물러난다. 이러한 서사의 기법은 사랑에 빠졌을 때, 평소라면 의미 있게 들었을 말들이 의미 없이 주변부로 밀려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2. 사랑을 몰랐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인생에 대해서.
인간이 사랑을 몰랐다면 인간의 수명은 지금보다 더 높았을까? 우리는 사랑을 하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으면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고, 슬픔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눈물이 나오는 날이면 연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람의 목소리는 힘이 없지만, 사랑의 목소리는 힘이 있어 눈물을 그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에서 사랑은 고난을 극복하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동반자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여기서 사랑은 당신을 위해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류선생/서래
사랑은 … 그 외 다른 모든 것의 포기니라.
서래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 방식이다. 해준을 위해 남편의 핸드폰을 바다에 던지고, 해준을 위해 바다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결국 서래에게 사랑은 죽음이 된다. 사랑은 여러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 슬픔, 분노, 배신, 미움 등등. 그러나 결국 사랑의 종착점은 아름다움이지만 서래에게 사랑은 아름다움으로는 채울 수 없다. 서래에게 사랑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을 몰랐다면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인간은 사랑하는 법은 알아도 사랑하지 않는 법은 모른다. 사랑이란 감정은 태어나면서 생겨난다. 아무리 잊어버리려고 해도 사랑은 기적적으로 허락도 없이 찾아온다. 애써 모른 척 해도. 그래서 사랑은 나에게 온 특별한 이미지이며 독특하고 창의적이며 유일한 이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