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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 작가 Feb 18. 2020

연민, 고독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독서중독자의 책 이야기

★ 인간의 정신성과 인간다움 그리고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연민

1.  전쟁과 폭력과 획일화로 얼룩해진 세상 속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편리하고 친절하다. 많은 시간을 가져야 가능했던 일들이 이제는 버튼 하나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얼마나 친철한 세계인가? 언제부터인가 종이책의 가치는 무너지고 영상이 전부인 세계가 되어 버렸고 평생동안 만나볼 수 없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우리는 더욱 고독해지고 지루해지고 상투적으로 변해버렸다. 

 삼십오 년째 압축기에서 종이를 폐기하는 일을 하는 한챠는 평생을 지하에서 지내왔다. 쉬는 날 없이 쥐가 가득하고 악취가 풍기는 환경에서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고전으로 불리는 책들이다. 아리스토텔레서부터 칸트와 헤겔까지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명작들을 읽고 모아 집 안 가득 채워넣는다. 사실 그가 일을 하는 지하실은 시간이 멈춰있다. 그래서 그가 있는 공간에서 이제는 사라져버린 왕실의 도서부터 고전까지 생생하게 살아서 때로는 환상을 통해 또는 환청을 통해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러나 그가 사는 지하실 밖은 여전히 폭력과 전쟁과 기계 문명화로 인한 획일화로 얼룩져 있다. 결국 한챠 역시 획일화 되고 개인화 되어버린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버려진다. 

 한 남자의 길고 지루한 독백으로 이어진 이 작품은 오랜 시간동안 지하실에서 종이를 폐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한권 한권을 소중히 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니 칸트니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인물들은 이제는 옛 사람이고 옛 작품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의 환상 속에 등장하는 예수와 노자는 이제 전설 속 인물이지 발달된 현대사회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은퇴한 후 자신이 모은 책 꾸러미를 전시하는 희망을 꿈꾸는 한챠에게서 이제는 잊혀지고 사라져버린 귀하고 소중한 가치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챠는 어쩌면 그가 폐기한 책들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 첫 장면부터 오랜시간동안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이제 내가 압축한 책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통해 이제 그 역시 지하실에 쌓인 책들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 쌓여 있는 종이를 어떤 연민도 감정도 없이 폐기해버리는 젊은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똑같다는 생각은 시대에 따라 버려지고 잊혀지고 사라지는 어떤 존재가 결국 문명화 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해 낙오되는 한챠와 다를바 없다. 

  한챠에게 책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소장의 욕설에도 불구하고 일이 밀리고 밀려도 종이 더미 속에서 이제는 잊혀진 귀한 책들을 골라내고 그것을 음미하는데 그것은 곧 독서를 통해 교향을 쌓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이다. 후에 그가 구해낸 책을 기증하고 감사의 편지를 받을 때도 이제 더이상 압축기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그는 스스로 책들과 함께 운명을 달리하지만 무엇보다도 압축되어지는 책들과 한챠의 모습이 얼룩한 세상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 씁쓸해보이기까지 한다. 

 절망적이고 시끄러운 세계 속에서 한챠는 고독한 인간이며 이제는 사라져버린 진정한 해방을 꿈꾸는 모습을 보며 우리 역시 한챠와 같은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무표정하게 종이를 던져버리는 젊은이들일까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종이의 잉크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제목을 통해 한챠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이었나

 한차에게 두 명의 여성이 존재한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만차와 우연히 만난 집시 여자다. 이 여성들은 그에게 의미가 남다른데 만차의 경우 두 번의 치욕적인 일을 겪었고 집시 여성은 유일하게 한챠가 사랑했던 여자였다. 어느 날 만차의 집에서 한챠가 꿈을 꾸던 이상향을 이룬 만차를 보고 패배감을 느꼈고 나치에게 희생당한 집시 여성을 통해 연민과 슬픔과 그리움을 겪었고 이 것은 한챠가 꿈꾸는 어떤 이상향과도 관련이 있다.

 제목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다. 아이러니하다. 고독은 조용한 것인데 너무 시끄럽다고 한다. 그렇다고 시끄러운 뒤에 ',' 가 없다. 말그대로 고독인데 너무 시끄럽다는 의미다. 우습지 않나? 그것은  한챠에게 세상은 고독인데 시끄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일까? 사실 한챠가 지내는 세상은 고독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함께 생활하는 쥐의 소리, 갑자기 찾아온 환상들은 시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술에 취해 그가 탐독했던 책 속의 인물과 집시들을 만나면서 행복함을 느끼기에 결국 그에게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되는 것이다.

 한챠가 원하는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희망은 은퇴한 후 그의 압축기를 외삼촌 집에 두고 그가 모은 꾸러미를 전시한다음 사람들이 구경오고 사람들이 기증한 꾸러미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에게 압축기란 소중한 책들을 파괴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종이를 만들고 새로운 책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신과도 같다. 그러나 그가 평생 일해온 지하실에서 은퇴가 하닌 전출이 되었을 때 압축기는 그를 파괴하고 세상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괴몰이 된다. 자신의 압축기의 몇 배의 일을 하는 커다란 압축기는 기계화의 상징이며 일과 여행과 여유를 원하는 젊은 노동자들과 조합은 그가 평생 아껴온 책들을 종이로만 인식하는 차갑고 냉철한 자본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에게 꾸러미는 책이다. 단순한 책이 아니라 가치이며 인간의 정신성이며 그동안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종이들이다. 하늘은 인간답지 않다는 반복적은 문구는 결국 그의 시끄러운 고독이 존재하는 지하실보다 더 시끄럽고 얼룩지고 더러운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챠의 꿈, 한챠의 이상적인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꿈꾸는 마지막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잡아먹는 압축기는 그의 꿈을 파괴하고 있었던 것일까? 새롭게 생산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작품을 통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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