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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 작가 Apr 16. 2020

괴물은 누구인가-[프랑켄슈타인]

독서중독자의 책 이야기

★ 『프랑켄슈타인』,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의 이야기




1. 『프랑켄슈타인』에서 발현된 욕망과 비극

 우리는 괴물이란 단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괴물이란 단어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은 끔찍함과 기괴함 그리고 두려움이다. 괴물은 공포를 유발한다. 그래서 양심도 없고 공포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악당을 종종 괴물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래서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과연 괴물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머리에 커다란 못을 받은 괴물의 모습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괴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은 이 책의 주인공이자 괴물을 만든 인물이다.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괴물은 창조되어지자마자 버려졌기 때문에 이름을 가질 수가 없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창조한 것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가지는 욕망은 무한하다.  자연을 이기려는 욕망,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욕망부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사소한 욕망까지 인간이 가지는 욕망은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욕망은 어릴 적 유아기 기억으로부터 왔으며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욕망은 어머니의 부재도 있지만 냉정한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자연주의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려는 연구는 아무도 그에게 그 연구가 위험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결국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 괴물을 창조하고 괴물마저 나락으로 빠트리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창조하는 과정은 아주 기이하다. 마치 미친과학자가 떠오른다. 누군가와도 만나지 않고 자기 몸이 약해지는 것조차도 생각하지 않을 만큼 그의 욕망은 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결과를 복 절망에 빠진다. 

  모든 소설에서 비극과 갈등은 욕망의 어긋남에서 시작된다. 액자 소설 안에 또 다른 액자가 들어있는 이 작품은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와 괴물의 이야기가 함께 겹치면서 우리는 그 비극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정말 괴물은 누구인지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괴물은 괴물 그 자체일 수 있지만 작품 속에서 괴물은 어쩌면 한 과학자의 희생양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마지막까지 괴물을 동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괴물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던 인간의 모습이 위선적일 수 있지만 반대로 자신과 똑같은 괴물을 요구하고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모습에서 과연 그 역시 희생냥이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욕망은 크게 두 가지 이다. 새로운 생명을 창조함으로서 위대한 인간이 되려는 사람의 욕망과 끔찍한 외모 때문에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복수를 다짐하는 괴물의 욕망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욕망은 서로 충족될 수 없어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을 낳는다. 또한 둘 중 누구도 하나를 제거할 수 없으며 두 사람은 평생 끔찍한 운명 속에 놓일 수 밖에 없는 것도 프랑켄슈타인의 최초의 욕망에 의해서이다. 결국 그들의 욕망이 괴물을 낳는 것이다.



2. 그런데 괴물은 누구일까?

 우리는 작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괴물은 누구인가? 그리고 괴물은 왜 이름이 없는가? 괴물은 이름이 없다. 프랑켄슈타인이 도망쳤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괴물도 자기 스스로 이름을 만들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창조주로부터 버림받은 괴물은 못생긴 얼굴 때문에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래서 그가 한 것이 인간의 언어를 배운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괴물은 자신이 비록 무섭게 생겨도 언어를 통해서 인간이 자신을 받아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이는 인간이 감정을 공유하는데 언어만으로는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그는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간다.

 그가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가고 자신과 똑같은 여자 괴물을 만들어주길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가 자기에게 이름을 부여하도록 부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창조주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서 인간이 사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삶이란 자신을 받아주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창조주가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되지만 창조주는 자신을 악마로 보고 배척하게 된다. 그리고 괴물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왜 괴물이 괴물처럼 안 보이는 것일까? 독자들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의문이 들 것이다. 그가 정말 괴물일까?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 스스로 만든 괴물은 처음부터 악하진 않았다. 인간과 교류하려 했고 외로움을 나누러 하다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자 창조자에게 자신에게도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길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고통만을 이야기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 그가 만든 괴물은 또 괴물이 아닌 것일까? 표면상으로는 희생양처럼 보이는 그도 어린 아이를 죽이고 죄가 없는 여자에게 누명을 씌운다.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그녀는 한번도 보지 못한 괴물에 의해 교수형을 당한다. 월리엄을 죽인 이유도 순수할 것 같은 아이가 자신을 겁내한다는 이유 그리고 창조주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이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분노에 의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창조물 역시 괴물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럼 누가 괴물인가? 프랑켄슈타인? 괴물? 그를 배척한 사람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유가 있다. 결국 이 모두가 괴물인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과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는 특성들이 모두를 괴물로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운 언어와 고전문학의 미를 표방하고 있어 더욱 끔찍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 소설은 모두가 희생양이고 모두가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름다움 삶을 원하던 괴물의 욕망이 더욱 슬프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은 생각해보자. 결국 괴물은 누구인가?





프랑켄슈타인/메리셸리/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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