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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 작가 Feb 28. 2020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독서중독자의 책 이야기

★ 멀리 날아가면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이 보이니까. 그것이 날개가 필요한 이유가 될 테니까




1.  은각마의 눈처럼 흰 뿔과 금곡조의 소리가 슬픈 이유는 무엇일까.


  구병모 소설에 등장하는 물고기 인간, 할머니 킬러, 그리고 익인은 비편실적은 존재이다. 현실 속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나 세계관을 우리는 판타지 세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병모 소설이 단순히 판타지문학이라고 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속에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설 『버드 스트라이크』는 판타지와 현실이 잘 섞인 작품이다. 익인이라는 존재와 사행이라는 직책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도시와 문명이 가져다온 비극이 그대로 표현되어 비현실적인 모습마저도 현실처럼 느껴진다. 제목인 [버드스트라이크]는 비행용어로 비행기가 조류와 부딪쳐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버드 스트라이크란 단어를 의미하는 새와 비행기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익인은 인간보다 새에 가깝다. 그리고 새는 자연을 의미한다. 반대로 도시인은 자연을 거스르고 사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이용하는 도구는 비행기다. 비행기는 익인들을 침략하기도 하지만 날지못하는 인간에게 익인이란 전설적인 존재이자 넘어서고 싶어하는 존재인만큼 비행기는 익인처럼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익인이 작품 속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의 도구로 전략한다. 익인은 오래전부터 자연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에게 삶이란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 반대로 도시인은 논리적어야 하고 설명이 되어야 하며 원하는 것은 무조건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걸 위해서는 전쟁도 납치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싸우는 것은 선이 될 수 없기에 익인들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조건을 들어주고 그들과 공존하려고 한다.

  인간이 가지지 못한 익인의 능력이란 치유의 능력이다. 익인은 날개를 이용해 치료하는데 이는 포용과 공존을 의미한다. 언제부턴가 은각마의 은각을 위해 새를 죽이고 강제로 새끼를 낳게 하고 쌀을 주식으로 하는 그들이 단지 쾌락을 위해 불필요한 감미와 마과를 필요이상으로 착취하는 모습은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문명화가 된 유렵이 고산지대나 유목민들을 착취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파괴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자연이라는 존재를 대비시키기보다 도시인과 익인들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익인은 새에 가깝지면 그들 역시 인간이다. 완전한 자연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시인은 흔히 말하는 문명화된 인간 지금 유렵과 한국을 포함한 도시와 되버린 사람들을 의미한다면 익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전통을 유지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유목민을 의미한다. 또한 이를 확장하면 도시인은 이기적인 인간을 말한다면 익인들은 자연과 공존을 주장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와 비행기가 부딪쳐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하는 버드 스트라이크는 결국 새도 비행기도 추락할 수 밖에 없고 인간의 욕심은 결국 익인도 인간도 추락하게 될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초원조는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태아났든 간에 생긴 그대로 품어주었다네.


  작품 등장하는 루와 비오의 공통점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오는 익인과 인간 사이에 태어났으며 루는 휴고의 이복동생이다. 루와 비오는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점에서 어디에서 속하지 못한다. 비오와 루는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마치 관용을 베풀어 받아주고 있지만 겉돌고 있다는 점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익인의 능력이 퇴화하고 그 수가 줄어들면서 익인의 순수혈통을 지키지 않으면 전설속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인간과 익인 사이에 태어난 비오의 존재를 거부한다. 표면적으로 비오를 받아주었지만 날개가 작고 치유 능력이 부족한 비오의 모습은 익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기에 같이 생활하되 너의 속성을 물려주지 말라고 말한다. 결혼도 성인식도 그에게는 불가능하다. 루 역시 같은 아버지지만 루는 순수혈통이 될 수 없다. 정식적으로 결혼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비서인 어머니의 존재는 루가 아버지의 친척들과는 대등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휴고가 루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외면이며 탄의 힘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어머니 역시 한 걸음 떨어져서 남을 대하듯  루를 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루와 비오같은 이들이 많다.  작품 속에 옛날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초원조는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도 그대로 품어주었고 비록 작지만 날 수 있어서 다행이 아니냐는 말은 어쩌면 루와 비오같은 아이들이 모습만 다르지 우리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오가 순수혈통이 될 수없고 완전하게 익인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날개가 작고 보통의 익인보다 크다는 이유이며 루가 친척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비서 즉 자신들과 같은 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이 결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소중한 인연이라면서 비오는 외면하는 이유에 대해 외치는 루의 목소리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초원조란 자연을 의미한다. 익인들이 전설처럼 따르는 초원조는 자연을 관장하고 익인들을 다스리며 그들이 언젠가는 의지하고 돌아가게 되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비오와 같이 모습이 다른 아이라도 상관없이 품는다고 했다. 이는 생긴 것은 전혀 상관이 없으며 비록 익인이 예전 조상과는 점점 다르게 되어가고 있지만 지금의 익인과 예전의 익인과는 차이점은 결코 신경쓸 것이  아니다.

 루의 한마디로 비오는 익인의 성인식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고 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익인으로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루와 비오같은 인물은 많다.  가까이에서 보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 혼혈, 서로 다른 인종, 종교가 다른 사람들 그리고 계급,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한다. 최근에 자신의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주공아파트에 사는 자녀가 있다고 시위를 하는 부모들의 모습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나 여성, 흑인, 동성애자 등 수 많은 루와 비오에 대한 편견과 시선은 결국 비오를 날지 못하게 하고 루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언제든지 마음껏 날아라. 라는 마지막 구절처럼 우리 주변에 수많은 루와 비오들이 여전히 날지 못하고 날개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버드스트라이크/구병모/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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