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 작가 Mar 03. 2020

함정임 - 곡두

독서 중독자의 책 이야기

★  삶의 끝에는 붙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환영이 안개처럼 지나간다. 



1.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가 왜 이토록 그리워야 하는가  

 곡두는 눈 앞에 없는 사람 혹은 물건이 있는 것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환영을 의미하기도 하고 환상을 의미하기도 하며 착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없지만 있을 것만 같은 이미지 그것이 곡두이다.

 작품 『곡두』는 제목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은 마치 연작소설 같다.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화자가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작품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떤 존재를 그리워 하고 있다. 그녀가 오빠의 부재를 넘어가지 못하는 것도 오빠가 끊임없이 동생을 피하는 것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존재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문학과 같은 이 작품은 그들이 무엇을 그리워하고 끈임없이 무언가를 찾으러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작품 속 인물 역시도 안개처럼 흐릿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곡두와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과거를 벗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에도 그녀는 오빠를 찾고 오빠는 또 무언가를 찾아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의 부재를 벗어날 수 없으며 달자 할머니를 찾아가는 이유도 살아가는 이유를 명확하게 찾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한번도 보지 못한 오빠를 만난다면, 달자 할머니와 매일 산책을 한다면, 이십년 동안 기다려 왔던 그 사람을 만난다면 그렇다면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작품은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제목처럼 작품도 곡두같다. 연작 소설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인물이 화가가 되어 나타나 누가 누구의 이야기인지 또는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어 환영같기도 하고 환상문학같기도 하지만 공통적으로 작품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외롭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찾고 있다. 곧 나타날 것 같은데 막상 보이지도 않고 만질수도 없어서 더욱 그립지만 때론 과거의 흠집처럼 눈 앞에서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어쩌면 삶이 가지는 이중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2.  기묘한 이야기 -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작품은 참으로 기묘하다.  처음 세 작품은 연작소설 같기도 하고 장편 소설 같기도 하다. 그러나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로 가면 전혀 다른 인물이 나오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마치 세혜라자드의 끝이 없는 이야기 같다. 어디선가 마법사가 들려주는 환상적인 이야기같기도 하다,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면 또 다른 이야이가 이어져 나오고 그 뒤로 또 다른 이야이가 이어져 나오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곡두를 향하고 있다. J를 기다리는 P, 아버지의 부재, 떠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사내, 지두화를 그린다는 오빠를 찾는 그녀 등 모두 정학하게 표현할 수 없는 곡두 같은 존재를 기다린다. 

 그들은 왜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사실 원하다면  찾는 존재를 눈 앞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희미한 오빠를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원한다면 J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된다. 실종된 아내도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달자 할머니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희미하다. 그리고 그 희미함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죽음이다.  살아있지만 희미하다면 그것은 죽은 존재이며 기억에 남아 있지만 명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왜? 나는 왜? 그는 왜? 그녀는 왜? 왜 만나고 싶어하고 왜 옆에 있고 싶어하고 왜 생각하며 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그들은 정답을 찾지 못한다.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현실이고 하나는 환상이다. 그녀에게 오빠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며 P에게 J는 환상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현실이지만 아버지가 피우는 담배는 환상이다. 결국 그들이 끊임없이 찾는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품고 있는 환상에 대한 의미 또는 진실에 대해 알고 있지 않으면 현실로 돌아올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이 환상 속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현실 또는 실재로 존재하는 현실을 살기 위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곡두/함정임/열림원

글쟁이의 블로그로 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