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나

유쾌하고 한편은 비관적인 J할아버지

by 탐구와여정

J할아버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큰 웃음을 주었다. 반갑게 인사를 한 뒤 발런티어를 하고 있다고 하자 의아하다는 듯이 "왜?"냐고 물어 나를 당황시켰다. 나이듦에 관심이 많고 노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라고 하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시종일관 큰 목소리와 밝은 미소로 이야기를 했기에 나를 당황시키려고가 아닌 나를 웃기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나는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특정 스펠링이 들어간 단어를 만들어내는 게임에 관심을 보이며 참여했는데 왠지 그리 잘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이 잘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노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왠만하면 나는 알아도 맞추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는데 영 속도가 잘 나지 않았고 생각해낸 단어들도 억지도 쥐어짜낸 듯한 단어들이 많았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J할아버지는 잘 맞추지 못하자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기분이 상했는지 조금 하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J할아버지는 뇌신경과학자라고 했다.

J할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할아버지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리 만난 적이 있나?"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런가보다라는 표정이었다. 흔히 일어나는 일인 듯,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조금은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자신의 네이버후드로 가려면 잠긴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간단한 번호로 된 키콤보였다. 주기적으로 변경은 하지만 외우기쉬운 패턴에 맞춘 번호여서 그리 어려울 건 없었다. 나도 아직 번호를 모를 때라 할어버지가 키콤보를 맞춰 문을 열어주기를 옆에서 기다렸다.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더니 할아버지는 약간 당황하면서 나보고 번호를 알고 있냐고 물었다. 내가 모른다고 하자 다시 한번 시도를 하면서 "음, 번호를 바꿨나,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문을 열게 되었고 할아버지를 나를 보더니 방긋 웃으며 해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삶은 매 순간순간이 자신의 기억을 시험하는 일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이 잘 작동할 때는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들이 치매를 겪으며 새삼스럽고 당황스럽고 도전적인 일이 되고 만 것이다. 내가 옆에 계속 있자 나에게 뭐 도와줄 게 있는지 물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할아버지는 역시나 왜냐고 의아한 듯이 묻고는 흔쾌히 시간을 내주겠다고 했다. 먼저 티셔츠를 갈아입고 올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J할아버지는 2년이 넘게 이곳에 있었다. 시설에서의 첫 시작은 악몽 수준이었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들어오게 되어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고 방을 배정받았는데 2인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룸메이트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듯했다. J할아버지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다행히 검사 결과 상태가 나쁘지 않아 초기 치매 노인들이 머무는 이곳으로 왔다. 이곳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에 점차 익숙해졌고 혼자서 방을 쓰면서 자신의 선호와 의지대로 생활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노인들이 하나둘씩 다른 시설로 떠나거나 다른 네이버후드로 옮기거나 하면서 한번 형성된 우정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의보다는 검사결과나 재정적인 문제 등으로 생기는 경우가 많다보니 J할아버지는 우울증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자신의 뇌 상태였다. 서서히 기능을 잃어가는 뇌, 그로 인해 예전처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된 여러가지 활동들, 이렇듯 정상적인 몸과 자유로운 활동들을 잃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상실감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에서 더 나아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보니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로 인해 우울감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실제로 간호부장의 말에 따르면 J할아버지의 경우 자신이 어떻게 될 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나쁘게 작용한 사례라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 사람들과 농담하면서 웃고 이야기하는 거, 요리하는 거. 달리는 거. 걷는 거...이 좋아하는 것들을 못하게 되는 게 너무 슬프지. 어떻게 이겨내고 있냐고? 신문 많이 읽고 거기에 나온 단어들 뜻과 스펠링 열심히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리스트를 만들어서 계속 외우고 공부해. 단어들에 빠져살고 있어"

그리 농담을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만 점점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다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꺼려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탓도 있을테고, 단어공부를 해야하는 이유도 있어서인지 J할아버지는 많은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었다. 방에서 책과 신문을 읽고 영화를 보고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모든 일들이 점점 더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했다.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느낌이야. 나는 여전히 나인데 한편으로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거 같아. 할 수 있었던 것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게 참 심란한 일이더라구."

하루 5마일 길게는 10마일도 달리던 J할아버지는 이제는 앉고 일어서는 것도 힘들고 워커를 이용해야만 걸어다닐 수 있다. 요리는 더 이상 하지 못한다. "기억들은? 삶의 기억들이 갑자기 튀어나오지. 대부분 좋고 즐거운 것들이야. 그 뿐이 아니고 내가 한 모든 것들이 종종 떠올라. 나는 과학자잖아 분석적이지. 그래서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는데 이성적으로는 이러한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려고 노력해. 보통은 기운을 내려고 하지."

과학자로서의 삶에 대해 묻자 J할아버지는 겸손을 섞긴 했지만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권위있는 연구소에서 수많은 연구원들, 박사과정의 학생들과 함께 200편에 가까운 논문을 낸 저명한 과학자였던 J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추억인 듯 그들과 보낸 시간들을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곁들여 이야기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는 전혀 막힘이 없었고 얼굴에도 흡족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 무얼 하고 싶냐고?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야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근데 그게 쉽지만은 않아.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거든.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둘 사이에 괴리가 있어. 나의 과거는 대체로 좋았는데 미래를 생각하면 희망적이지만은 않지. 그래서 힘들어. 나는 여전히 나인데 이제는 내 맘대로 되지가 않아."

치매가 어떠한 병인지, 그 과정이 어떠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J할아버지. 자신이 치매에 걸려 기억이 쇠퇴하고 몸의 기능도 떨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은 기억만으로도 자신은 여전히 자신이기도 하기에 그 사이에서 혼란과 좌절을 겪고 있었다. 예전의 나와는 다른, 그러나 여전히 나인, 지금의 내가 낯설고 안타까우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남은 기억마저도 점점 더 사라져갈 것을 알기에 한편으로는 이마저도 너무나 소중하기만 한 상태. 이를 부여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어려움에 부딪쳐 좌절하고 또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J할아버지의 고군분투가 너무도 절실해서 안타깝기만 했다. 하지만 J할아버지의 이러한 노력이 그나마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리라. J할아버지의 얼굴에서 당황과 고민, 좌절보다는 장난스러운 웃음과 안도, 만족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두 손을 모아 J할아버지를 응원하고 또 응원했다.



이전 04화저마다 다른 각자의 방식으로